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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늙어버린 여름 - 늙음에 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두려워하기'를 시작하게 될까 봐 두렵다. 지금껏 그런 감정 따위에 져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24p)"
『내가 늙어버린 여름』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으며 홀로 살아가는 여성의 늙음에 관한 고찰이 담긴 책이다.
책의 저자인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은 프랑스와 미국 두 나라에 살면서 이중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학창시절 페미니즘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서 프랑스 문학과 여성 문학을 가르친 여성이다. 이자벨의 '늙음에 관한 고찰'은 그가 살아온 배경의 지대한 영향 속에서 표현된다.
나이 듦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고 꾸밈없이 쓴 글은 처음이다. 이전에 봤던, 나이 듦을 주제로 잡은 에세이들은 밝고 쾌활한 할머니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그렸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늙어가면서 느끼는 고독, 불안, 두려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로선 아직 느끼지 못하는, 나이 든 여성이 노화로 겪는 솔직한 감정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옛날의 저자처럼 나도 노화가 아직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여태 엄마나 이모들이 얘기하는 나이 듦의 고충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엄마나 이모가 했던 '이 바지 입으면 살이 너무 없어 보이지 않냐,' '나이 드니까 이제 저 글자가 잘 안 보인다', '전이랑 다르게 자꾸 깜빡깜빡한다' 같은 말이 생각나면서 그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진지한 고민이었으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겠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와도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됐다.
저자의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술술 잘 읽혔다. 글씨도 크고 분량이 많지 않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저자가 느끼는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는 중점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그저 나이 든 여성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이 듦을 느끼고 있는 사람, 노화로 인해 변화를 겪는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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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p. 늙는다는 두려움, 병드는 데 대한 두려움. 어울리지 않는 이들과 동행하느니 차라리 홀로 고독한 편이 더 좋다고 큰소리치던 나였는데, 독신으로 남지 않으려 정서적 타협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우습게 알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이제는 고독이 두렵다.
42p. 나는 그 무렵의 내가 슬픔으로 약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이 있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에야 상실, 그러니까 소중한 존재든 좋아하는 어떤 장소든 상관없이 하여간 모든 형태의 상실과 연관된 감정을 어느 정도까지 철저하게 억압하고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45p. 비관론은 상실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이자 상실을 길들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황당함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88p. 늙는다는 것은 이미 구태의연해진 논리 속에 다시금 몸을 던지지 않고, 대신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것이기도 하다.
122p. 문학은 늘 나를 지탱해주었다. (...) 이야기를 구성하는 소중한 말들 덕분에 나는 꾸역꾸역 우직하게 장애물들을 넘을 수 있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