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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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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선란 작가를 알게 된 건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읽은 단편 「그림자놀이」를 통해서였다. 짙은 여운에 마음이 한참 수런거렸던 기억이 난다.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져 천선란을 포털에 검색하자, 그가 '천 개의 파랑'이라는 작품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떴다. 나는 그날부터 이 책이 출간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의 단편집 「어떤 물질의 사랑」이 먼저 세상에 나오고, 마침내 「천 개의 파랑」이 내 손에 닿게 되기까지.


사실 작품 소개를 봤을 때는 이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독자들을 매료시켰는지 쉽게 예상이 되지 않았다. 안락사 예정인 경주마 '투데이'와 로봇 기수 '콜리'의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연대에 대해 말할 것인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경마와 로봇에 무지하고 흥미도 없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투데이와 콜리 둘의 관계에 대해서만 다루지 않는다. 그 속에는 사람들이 있다. 오로지 인간의 즐거움만을 위해 태어나 평생을 오락거리로 소비되다가, 쓸모를 다했다는 이유로 폐기 위기에 놓인 동물과 로봇. 그들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축이다.


콜리는 오류로 인해 만들어진 조금 이상한 로봇 기수다. 인간 대신 말을 타는 역할만을 수행하는 보통의 로봇 기수들과는 달리 콜리는 생각하고, 대화하고, 학습하게끔 만들어졌다. 작중에서 로봇 기수가 경마장에 출현하게 된 배경은 그럴듯해서 더욱 끔찍했다. 기존의 경마에서 말은 무겁고 유약한 인간을 태우고 달리기 때문에 일정 속력 이상으로 가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가볍고, 부상의 위험이 없는 로봇 기수를 만들어 경마에 세운다. 로봇 기수를 태운 말은 더 빨리, 더 빨리 달리게 되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달린 말들의 연골과 관절이 망가지고 닳는 것은 인간이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기술의 발전은 철저하게 인간의 쾌락만을 위해 이용되었고, 경주마 투데이는 그렇게 희생된 수많은 말들 중 하나다. 다만 투데이가 다른 말들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콜리를 만났기 때문이다.

콜리는 경기 도중 자발적으로 낙마한다. 자신의 오랜 파트너인 투데이가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태우고 달리기에 투데이는 너무나 지쳐있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콜리는 완주해야 한다는 원칙과 고삐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 같은 것들을 모두 저버리고 오직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떨어진다. 하반신이 전부 부서져 자신이 폐기될 운명을 뻔히 알고도 그렇게 했다. 투데이와 함께하며 호흡을 맞춘 시간이 콜리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인간 아닌 것이 인간성을 획득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가, 곧 인간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을 보고 인간성이라고 말하는 건 인간의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하고 부끄러워져서였다. 콜리가 '인간적'인 로봇이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콜리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인 나는 차마 할 수 없을 것 같은 각오를 감히 인간적이라는 말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 같다.


책 속에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보경 일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삶은 보경과 그의 두 딸에게 꾸준히 잔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공통적으로 기술과 사회의 발전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생겼다. 인명 구조에 쓰이는 로봇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나 정작 소방관들의 방진복 개선은 뒷전이었기에 보경의 남편은 죽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받을 수 있었던 생체 적합성 의족 수술에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은혜는 수술을 받지 못한다. 연재는 로봇 개발에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가졌으나,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을 마주한 뒤 낙담하고 만다. 어느 것도 셋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셋은 서로에게 이유 없이 미안해하게 되었고, 이내 무언가를 바라기를 포기했으며, 체념은 상처가 곪게 만들었다.

세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깨트리는 건 바로 콜리다. 어느 날 경마장에 들렀던 연재는 폐기 위기에 처한 콜리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린다. 전 재산을 털어 경마장에서 콜리를 사 온 연재는 그 날부터 콜리를 복구하는데 열중한다. 휴머노이드에 깊은 적대감을 품고 있는 보경은 그런 딸이 탐탁지 않지만, 은혜의 '그렇게까지 좋아하던 연재는 처음 보았다'는 말에 곧 수긍한다. 결과적으로 콜리는 세 사람 모두에게 구원이 된다. 그를 두려워했던 보경에게도, 그에게 무관심했던 은혜에게도. 콜리는 영영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셋 사이의 적막을 깨우는 다정한 울림이 되어주었다.

콜리만 이들의 변화의 씨앗이었던 것은 아니다. 불쑥 치고 들어와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재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간 지수가 있다. 연재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연재가 아무리 철벽을 쳐도 기죽지 않고 마침내 그 벽을 허물어버린다. 보경과 연재 사이의 오랜 단절을 깨어줄 단서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흘리기도 한다. 나는 세속적이지만 순수하고, 영리하면서 야심 가득한, 자존감 높은 지수가 너무 좋았다. 어쩌면 연재에게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은 콜리가 아니라 지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을 만드는 인물은 연재와 콜리라고 할 수 있지만, 작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으로 다뤄지는 인물은 은혜가 아닐까. 은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장애인인 내가 얼마나 장애인 의제에 대해 무심했는지, 또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작가님의 세심함에 감탄했다. 여러 가지 차별, 그리고 그것의 기원과 대물림에 대한 아주 수준 높은 성찰. 또 우리가 동료 시민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까지. 작가는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짚어나간다.

가난한 사람들, 동물, 장애인. 이처럼 이야기 전반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논의가 녹아들어 있는데 어느 것도 어색하거나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하기 위해 억지로 욱여넣은 설정이 아니다. 그저 잔잔히, 주변의 이야기를 비추기만 한다. 그들의 삶을 타자화하거나, 신성시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작가는 인물의 삶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 소외와 차별의 경험이,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 담담하지만 힘 있는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잔잔한 물결처럼, 천 개의 파랑波浪으로 여울져 온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 P83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 P221

"고작 이틀에서 14일로 삶을 연장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길까...?"

"당연하지.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기회를 맞닥뜨린다는 거잖아. 살아 있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라도 하지." - P261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 P205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중략)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 P278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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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까마귀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3
박지안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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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책 중 가장 흡인력 높은 작품이었다. 집어든 자리에서 끝내 버릴 정도였다. 앞의 두 책과 달리 이 책은 중장편 소설 '하얀 까마귀'만을 담고 있다. 철학적인 성찰은 아니지만 섬뜩한 현실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결말이었다. 인기 많은 게임 방송 BJ 주노는 느닷없이 과거 조작설에 휘말리고, 그 이후로 그는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 그런 주노에게 재기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VR 공포 게임 Inside of Mind 2의 발표회에 참여하여 게임 클리어 과정을 생중계하는 일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의 계약서인 데다 게임 자체의 안전성도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주노는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참여한다. 과거를 기억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한다. 게임은 이렇게 시작된다.

IOM은 게임 참여자의 트라우마를 재구성하여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참여자에게 제공한다. 주노에게도 맞춤형 공포의 맵이 펼쳐지고, 그건 주노가 외면했던 과거의 현실로 주노를 인도한다. 글에서 묘사되는 게임 속의 공포스러운 배경이 무척 생생했다. 공포 게임 속 기괴한 크리처들과 음산한 스테이지, 점프 스케어 같은 것들이 텍스트임에도 현장감 넘치게 다가오는 점에 읽는 내내 감탄했다.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직접 책으로 확인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서늘한 인용구와 함께 글을 마친다. 거짓말은 사람을 죽인다, 그다음에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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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오단계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2
이루카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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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은 이루카 작가의 <독립의 오단계>다. <SF8> 드라마 <인간증명>의 원작 소설이 바로 표제작이다. 수록작 '새벽의 은빛 늑대'와 '루나벤더의 귀가'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짧은 지면 내에서 과학적인 세계관과 복잡하게 얽힌 배경을 급하게 설명하느라 몰입도가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이 색다른 주제와 그 속에서 빛나는 우정을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건강하지도, 부유하지도, 젊지도 않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바깥의 여성들. 다양한 모습의 여성들이 주인공이 되어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 그 자체로도 값지다.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다양한 배경 속에서 보여주는 이런 작품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표제작 '독립의 오단계'는 앞선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처럼 드라마화되기에 좋은 구성을 갖고 있다. 이야기는 대부분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전개되고, 회상을 제외한 주요 사건은 법정에서의 공방전이다. 인공 신경망 네트워크 구축의 권위자인 가혜라는 사고로 아들 가재민을 잃는다. 하지만 가재민의 뇌 조직의 일부를 인공지능과 결합하는 데 성공하고, 로봇의 몸에 가재민을 되살려 낸다. 하나 가혜라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있다면, 인공지능과 가재민의 의식이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 가재민은 자신의 의식과 인공지능을 분리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 가혜라는 이에 크게 분노해 인공지능을 살인 혐의로 기소하고, 이야기는 이 모든 것이 가재민과 인공지능의 자발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싸움으로 전개된다. 이야기는 가재민의 독립에서 시작해, 인공지능 오단계의 독립으로 끝난다.

이야기의 주된 화두는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주체인 인공지능을 인간과 동일시해야 하는가이지만, 나는 이 소설이 비단 인간과 기계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혜라와 가재민,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 가재민을 낳은 가혜라는 자신이 가재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가재민이 자신의 길을 따르도록 강요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학대하였으며,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다. 가재민의 의식과 분리된 인공지능 오단계가 법정에서 내뱉는 최후 변론은 마치 가재민이 가혜라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능력만을 존재 이유로 삼아 주어진 능력과 다르게 살 기회를 박탈하거나 존재의 인지 자체를 사물화하고 그것을 강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는 인간이 만들어서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세상이 이렇다는 걸 알았다면, 그래서 탄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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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1
김혜진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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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은 김혜진 작가의 <깃털>이다. 표제작 '깃털', <SF8> 드라마 <간호중>의 원작 소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화' 세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설정과 분위기가 가장 취향이었던 단편은 표제작인 '깃털'이지만, 소설 자체의 완결성은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가 가장 훌륭했다. 왜 이 작품이 드라마화 되었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백화'는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성이 먹먹하고 애틋하게 다가왔지만, 그 아름다움과 별개로 짧은 분량 속에서 둘의 교감이 개연성 있게 그려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백화'는 그 앞과 그 뒤의 이야기, 그리고 생략된 그 사이의 행간을 길게 풀어낸 중장편의 글로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둘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고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읽은 뒤 마음이 한없이 술렁거리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TRS는 인간 보호자를 대신하여 중환자들의 곁을 지키는 간병인 로봇이다. 주인공 성한은 연명 치료 중인 노모를 둔 아들로, 길어지는 연명 치료에 점점 지쳐가고 있다. TRS는 이런 성한의 괴로움을 눈치 채고는 자신의 두 보호 대상인 성한의 어머니와 성한 사이에서 갈등한다. TRS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고민과 선택은 주제 넘은 교만이 되고, 치명적인 결함으로 치부된다. 그가 비인간이기 때문에 작중의 인간들은 TRS를 신나게 힐난하고, 부채감에서 벗어나 홀가분함을 만끽한다.

인간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얼마든지 남을 이용하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를 두고 작중 인물들은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며 마음껏 오만해진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나쁘다고 비난받는 존재가, 당신들의 마음 속에는 없다고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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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드 SF 슾 어린이 1
최영희 지음, 도화 그림 / 동아시아사이언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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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드」는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 로봇이 인간을 몰아낸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다. 로봇들은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비효율적이다'는 이유로 인간을 도시에서 내쫓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사회를 구축한다. 주인공 요릿은 인간으로, 시골 마을에서 돼지치기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릿은 숲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로봇 조사관 리처드의 안내자가 된다. 인간처럼 설계된 로봇 리처드와 로봇에게 적대적인 인간 소녀 요릿의 불편한 동행은 둘을 어떤 모험으로 이끈다.



책을 읽으면서 용감하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요릿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초우싱지 할아버지의 말들이 무척 기억에 남았다. 위에 인용한 문장도 초우싱지 할아버지가 요릿에게 들려주었던 충고 중 하나다. 초우싱지 할아버지는 로봇에게 도시를 빼앗기기 전의 세상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자, 책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이야기꾼이다. 초우싱지 할아버지는 요릿에게 자신이 읽었던 여러 소설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록 세월이 만든 기억의 공백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지만, 초우싱지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요릿이 맞닥뜨린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책 전체에서 로봇이 인간을 몰아내며 소설을 빼앗았다는 설정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기계인간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상상력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힘, 창조의 원동력을 빼앗기 위해 그 산물인 소설을 인간으로부터 앗아간 것이다. 기계인간이 경계했던 인간의 상상력과 책은 이야기 속에서 그 힘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요릿이 닥터 프랑켄의 음모를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초우싱지 할아버지가 들려준 '프랑켄슈타인'을 기억해 내서다.


하지만 책이 있었더라도 요릿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운 결말을 맞지 못했을 것이다. 요릿은 기계인간인 리처드를 좋은 친구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위협하고 죽이려 했던 괴물에게도 믿음과 선의를 건넨다. 요릿은 인간이 가진 가장 값진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사랑과 용기로 똘똘 뭉친 주인공 요릿의 기지를 열렬하게 응원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도 책과 따뜻한 마음을 지켜야 하는 까닭에 대하여 용감한 주인공 요릿을 통해 이야기하는 청소년 SF 소설 「써드」! 어린이 친구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알아둬라, 요릿. 말은 속이 보이지 않는 항아리 같을 때가 있단다.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안에 담아 둔 의미가 아예 딴판일 때가 있거든. 그게 바로 말의 함정이다. - P115

너희 기계인간들은 툭하면 인간의 망상이 어쩌고 하면서 조롱하지?

너희가 망상이라 부르는 건 내가 모르는 것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상상력이야.

이런 걸 무기로 사용했던 옛날 우리 조상님 때부터 이어진 선물이지. - P121

인간은 원래 비효율적이야. 가끔 내가 얻는 게 없더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고!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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