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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력 - 자주 말문이 막히는 당신에게
이도영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월
평점 :

표지를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는 기호, 문장부호들이 귀엽지 않나요. 요리조리 책을 움직이면 무지개/오로라처럼 표지가 빤딱빤딱거리는데 매우 아름답다. 나는 책을 관상용으로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책 표지가 중요한데 일단 표지는 합격.
이 책의 부제는 바로 ‘자주 말문이 막히는 당신에게-’... 잠깐 눈물 좀 닦고 갈게요.
나는 전화보다 문자가 편한 인간으로 머리에서 생각을 딱딱 정리해서 말을 하는 것이 너무너무너무 어렵다.
대충 뇌에 실타래 같은 생각들이 있으면 그걸 술술술술 풀어서 입 밖으로 내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나같은 사람은 뭉쳐있는 채로 내뱉어서 듣는 사람이 ‘쟤 뭐래냐’싶게 만든다. 그래서 과거에 횡설수설하면서 헛소리를 했던 장면이 떠오르면 (ex 토론대회) 관자놀이를 팍 치고 기절하고 싶다. 아직도 대학교 면접 어떻게 붙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 ‘언어력’은 작가가 ‘국어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나용’이라는 질문에 고민하면서 이것들을 모두 아우를 용어를 찾다가 ‘언어력’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언어’+‘력’이니까 대충 ‘언어를 잘 사용하는 힘’이겠거니..하지만 그 속에 꽤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궁금하면 읽어보세요)
그래서 이 책은 총체적으로 ‘언어’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다.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같은 것들. 일상에서 이 4가지 중에 하나라도 안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대충 아무나 다 읽어도 좋다는 소리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몇 개 적어보자면,
1. 언어와 사고의 관계
브라질의 투유카어와 우리나라 말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다. ‘투유카어’는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의 하나라고 한다. 내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투유카어가 ‘다섯 가지 증거성 체계’라는 것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뭐냐면 증거의 명백한 정도를 언어로 표현하는 체계다.

잘 보면 똑같은 문장 뒤에 –wi, -ti, -yi, -yigi, -hiyi를 붙여서 내가 그걸 봤는지, 안 봤는지, 확실한지, 전해 들은 건지, 짐작한 건지 알려주고 있다. 투유카어 사용자들은 이렇게 뒤에 추가적인 정보를 붙이지 않는 문장은 만들 수가 없다고 한다!! 그니까 이 사람들은 말할 때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 거다. 상대적으로 다른 언어 사용자들에 비해 거짓말하기 힘들 것 같다.
한국어에는 높임법이 있다. (한국어 높임법이 복잡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함) 그래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나이, 지위, 직업, 친밀감을 고려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말할 때마다 ‘이 사람한테 말을 놓아도 되나, 존댓말을 써야 하나?’라는 질문을 받는 것.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존경, 비하, 겸양, 차별, 수직관계’와 관련된 사고가 내면화된다.
우리나라에서 나이 족보에 유별나게 신경 쓰는 것도 이런 언어와 다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언어와 사고의 관계가 이렇게 밀접하다. 언어에 영향을 받아 그 언어의 사고법을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인다는 것, 신기하고 무서웠다.
2. 듣기의 중요성
듣기의 중요성. 이 챕터를 읽으면서 재재님 생각이 났다. 뛰어난 인터뷰어의 자질이 바로 이 ‘듣기’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서...
사실 나는 말을 좀 못 알아듣는 편이라 누가 뭐라고 하면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어? 뭐라고?라고 여러 번 물어볼 때가 많다. 그러다가 대충 알아들은 척할 때도 있고...
책에 ‘잔류 사고 여유’라는 개념이 나온다. 대개 사람들은 상대방이 말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사고할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양의 잔류 사고 여유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데...그니까 이 여유분의 시간에 딴 길로 새지 말고 이렇게 (Like This) 하라는 말이다.

이걸 다 하는 건 힘들 테니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선택해서 효과적으로 듣는 습관을 들이라고 한다. 근데 뭔가 재재님은 이걸 동시에 하시는 분 같기도...새삼스럽게 존경스럽고 그렇다. 문명 특급 보면서 감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센스와 배려심과 입담과 노래 실력 춤 실력에 (이하 생략)
3. 귤에 붙은 하얀 속껍질 이름 뭔지 아는 사람
작가님이 귤의 하얀 속껍질 이름을 직접 지어보라고 하셨는데...진짜 이름이 뭔지 궁금했던 저는 생각을 포기하고 검색하고 말았습니다. (귤락이라고 한다)
폭죽 터뜨리면 안에서 나오는 종이 쪼가리들 이름도 뭔지 몰랐는데 얘들은 ‘폭죽토’라고 부른다고 한다. 폭죽이 진짜 토하는 것 같긴 해서 굉장히 어울리는 이름 같다.
갑자기 요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언어에 새로운 이름 붙이기라는 챕터가 있어서...인간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그게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우리 모두 이름 붙여보기 놀이를 습관화해 봅시다.
이 외에 언어의 ‘선택과 배제’ 챕터도 기억에 남는다. 차별적인 시선을 담은 언어에 대한 고찰들이 담겨 있었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만든 이들의 사고, 입장들이 투영되어 있다. 일상에서 조금 불편하게 마주치는 언어들을 지나치지 말고 그 언어 너머의 의도들을 한 번씩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나의 언어생활은 어떤지 생각해보게 되는데..잘 모르겠다..세상은 요지경...잘못된 점을 알았다면 고쳐나가야겠지!
작가님이 국어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시고 화법과 작문 교과서 제작에도 참여하신 적이 있어서 그런지 책이 쉽게 잘 읽힌다. 내 동생한테도 추천해 주고 싶은 책!(근데 안 읽겠지) 그리고 책의 챕터들이 흥미로워 보이는 질문들로 시작하고 있어서 일단 흥미 유발 먼저 하고 ‘함 들어와바라..’하는 느낌.
각 챕터가 짤막짤막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지 호흡을 짧게 짧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가벼울지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작가님 말씀처럼 이 책이 ‘만병통치약’은 못될지라도 (애초에 그런 게 있지도 않지만) 언어의 힘을 알고 언어에 힘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