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하여 - 그리고 성, 사랑, 결혼에 관한 3부작
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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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며 읽었다. 먼 과거의, 각기 다른 사회에 적응하여 생활하는 드니 디드로와 나의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이고, 책에는 작가의 가치관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다. 하지만 책을 덮고서 든 생각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지금은 21세기, 이 책을 쓸 당시는 18세기. 3세기의 간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나는 생각보다 통하는 의견이 많았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초점을 맞췄더니 작품이 다르게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 이 나라의 여성의 인권이란 어떻게 취급되었나, 크게 힘을 들여 찾아보지 않아도 작품 자체에 다 명시되어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작은 앙탈을 부리는 행동으로 배신감을 묻어야 하고, 남편의 사유물이 되어 온갖 수발을 들다가도 찰나의 실수로 버림받는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된다. 현 사회에선 그런 몰상식한 분위기가 용납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성별은 유전자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일 뿐,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대우에 영향을 줄 순 없다. 그냥 그런 건데, 그냥 그랬던 거지. 이제 와서 그 시절을 탓할 생각은 없다. 내가 그들을 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 왜곡된 사회에서 혐오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 하는 의문은 감출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없을 줄 알았는데, 드니 디드로가 내 앞에 나타나서 자기주장을 펼친다.

드니 디드로의 모든 주장과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순 없다. 드니 디드로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의견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의견도 모두 옳지 않고, 모두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역사가 필요하고 미래가 필요한 것이겠지. 긴 시간을 두고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과정을 통해, 나의 무지를 인식하고 개선할 수 있는 거대하고 합리적인 통찰. 역사 속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우리 사회가 적당한 통찰과 반성을 통해 조금 더 '나은 길'로 접어들었단 뜻이다. 그 기반에는 과거가 있다. 잊어서는 안 될 포인트.


드니 디드로는 여성의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래서 제목도 <여성에 대하여>.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땐, 여성 작가의 여성 인권 증진과 관련된 사회 고발 작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반대라고 할 수 있나? 작가 성별이 다를 뿐 드니 디드로는 나의 예측과 굉장히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렇다. 그 시대 대다수의 남성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여성의 인권과 한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며 에세이와 콩트를 써내렸다. 그가 속해있는 사회를 투영하고서도 이런 말을 담아냈다는 건 그의 의지와 호기심이 얼마나 짙었을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을 살피다 보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람이 얼마나 옛사람인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고려하여, 어느 정도 흐린 눈을 장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작성된 글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좋은 점만 골라서 보기에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책.


내가 계속해서 언급하는 드니 디드로가 속했던 시대와 사회의 분위기는 '폐쇄적이다 못해 대부분이 왜곡된 과거의 여성 인권'을 대체하는 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과거의 어느 나라라고 해서, 자신의 이익을 당당히 챙겨냄과 동시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편을 합당하게 처벌하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억압된 분위기에 의해 짓눌려 마음을 모두 표출하지 못했을 수도, 그 경우의 수가 지극히 적었을 수는 있겠다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순 없지. 드니 디드로는 그 점을 꼬집는다. 여성이 큰 소리를 내며 예비 남편에게 서약을 받아내는 장면,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웅성대는 주위 사람들, 떳떳하게 알겠다고 대답을 해놓고 결국 서약을 어기는 남편. 그 남편을 매몰차게 버리고 떠나는 여성. 과연 이 여성의 행동 중 잘못된 부분은 무엇인가?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없다. 잘못은 남편이 했으니까! 여기서 우린 뭘 느껴야 하느냐, 이 똑 부러진 여성이 아주 특이 케이스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여성은 멀쩡한 사고 활동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에도, 많은 감정과 권리를 강제로 생략 당하며 살아왔다. 그 이유는? 나는 잘 모르겠다만 드니 디드로의 책을 읽어보면 그 이유가 대단히 타당하진 않았다는 사실 하나 정도는 캐치할 수 있다.


드니 디드로의 직업은 철학가, 문학자, 계몽사상가라고 한다. 과거에는 여러 학문을 동시에 탐구해내는 사람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니 직업이 여러 개인 것은 그리 놀랍지 않으나, 그렇게 똑똑하고 계몽적인 머리를 여성의 한계점을 고찰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점이 놀랍다. 당대 주류 철학, 문학, 계몽가들은 하지 않았던 생각을 했다는 건데, 그런 의미에서 이미 본받을만한 사람이라는 점이 증명됐다. 그 획기적인 사고를 단면적으로 드러낸 것이 이 <여성에 대하여>라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의식적으로 생략하고 제거한 것처럼 공공연하게 다뤄지지 않던 여성의 세상, 그들이 나누는 사랑과 이별과 성과 만남, 그리고 누리고 싶었고 누려야 했던 권리에 대한 점을 콕 집어 자신만의 해석을 바탕으로 풀어냈다는 것. 현대에서도 공감을 받는 작품일 수밖에 없는 이유. 사실 나는 이 책이 한 편의 에세이와 세 편의 콩트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유독 흥미롭다. 에세이에서 자신이 하고픈 말을 모두 풀어내고, 특정 상황을 가정하거나 각색한 콩트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생각을 조금 더 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작가는 여러 의미로 굉장히 획기적이고 계몽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마무리 지으며 옮긴이는 말한다. '드니 디드로는 - 남녀의 생리적 조건과 심리적 반응의 차이를 묘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 및 사회 문화적 배경에 의해 그것이 강화되는 과정을 고찰하면서 문명의 발달은 여성의 한계 극복에 도움이 되는 것임을 여러 텍스트들을 통해 설파하였다.' 편견의 강화는 굉장히 쉽다. 중립적인 상황에서 합리적인 자신의 의견을 정하는 것이나 어렵지, 누군가 이미 편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둔 상태, 게다가 자신이 속한 무리가 우위를 선점한 상태라면 누구나 그 흐름에 탑승할 생각이나 하지, 배경에 대한 근본적 고찰까지 닿도록 사고 회로를 가동하지 않는다. 당대로서 드물기는 물론, 3000년이 더 지난 지금에서도 한 번쯤을 읽어볼 만한 마인드를 가지는 작가와 작품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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