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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시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1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평점 :
‘좋은 글을 쓰고싶다’고 생각한 후, 여러 가지 생각 위를 떠다니는 요즘이다. 좋은 글의 기준. 아무튼 어떤 종류의 ‘(마음의)동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상을 잊고 그 글들을 주파할 정도로 재밌다면 좋은 글이라 말할 수 있다. 글이 엄청나게 길어서 읽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거나, 글은 진짜 재미없었는데 한 문장이 마음에 남아 삶의 순간들에서 그 문장이 함께하도록 만든다면, 이 역시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적 의미를 가진 글들 역시 좋은 글들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에겐 ‘좋은 글’의 유일한 의미이다. 다만 나는 사회적 의미라는 것을 생각할 때면 항상 조심하곤 한다. 나는 문학이 개인의 편이길 바란다. 소위 문, 사, 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개인의 편이 되길 바란다. 이 분야들은 언제나 ‘글’이라는 매개를 가지며, 글은 개인으로부터 시작하는 행위이지 않나. 개인이, 혹은 개인들이 쓰는 글에 개인을 소외시키는 글이 쓰인다면 위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기계가 쓰는 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철의 시대』는 재미없다. 적어도 나는 이 글들을, 일상을 잊으며 단박에 주파할 수는 없었다. 편지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글은 조금 두서없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뜬금없이 자기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기술한다. 사실 편지라기보단, 자동기술기계가 적어낸 일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의식을, 끝도 없이, 흐르는 대로 읽는다는 건 꽤 피곤한 일일 수 있다.(물론 어떤 종류의 패턴이 분명히 있긴할 것이다.)
왜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 설명하려면, 아마도 내용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귀찮은 일이다. 귀찮지만 정리해 놓으면 나한테 좋겠지.
편지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한 할머니, 커런 부인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느 날 커런 부인은 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앞에서 개 한 마리와 허름한 판자 안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 퍼케일을 발견한다. 딸은 일찌감치 거의 내전중인 남아공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것 같다. 그나마 주변의 사람이라 하면 가정부인 플로렌스(아마 원주민일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커런 부인은 끊임없는 삶의 고통으로 인해 몸부림친다. 결정적으로 플로렌스 부인의 아들의 친구가 백인 경찰들에게 학살당하는 일을 목격한다. 결국 커런 부인은 죽는다. 그러나 퍼케일의 품 안에서 죽는다. 커런 부인은 죽기 전까지 퍼케일이 자신의 옆에 남아주길 바랐으며, 그 바람은 이뤄진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들을 적은 이 글을 퍼케일이 자신의 딸에게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글은 일종의 유서이자 일기, 편지이다.
다소 경박한 시선으로 보자. 이 이야기는 한 백인 할머니가 노숙자 흑인 아저씨를 취한 이야기 아닌가? 또 사회적 문제보단 개인의 문제에 집중한 이야기이지 않나? 그렇다면 그게 나쁜건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철의시대』가 갖는 미덕과 연결되는 점들이다. 백인 할머니가 백인 할아버지와 연결되는 구조라면 조화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조화를 말함직한 이유는, 아파르트헤이트, 말 그대로 분리정책의 시대를 이 책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을 통해서가 아닌 조화. 여기에 노숙자와 기득권이라는 사회적 계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녹여야 하는 게 조화의 목적이기도 하니까.
사회보다 개인의 문제에 집중한 점도 이 책의 생각해봄직한 특징이겠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소설들은 으레 선동적이다. ‘불편해 하라’, ‘움직여라’, ‘너 자신의 자리를 다시 생각해보라.’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게 미덕인 공간은 사회문제가 다뤄지는 토론공간밖에 없을 것이다. 실생활에서는 개인으로서 남을 존중하는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종종 자극적인 언설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대게는, 개인의 맥락이 없어지길 바라며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려는 행위.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문학, 사학, 철학이 개인의 편이길 바란다. 누군가의 입장이 아닐 수는 없으며, 누군가의 입장이 아닐 수 없다면, 누군가의 입장을 충실히 변호해주길 바란다. 『철의 시대』는 그 거대한 재미없음에도 불구하고, 읽을만한 가치를 충분히 건질 수 있는 글이다. 커런 부인은 말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신비화함으로써 전쟁을 부추긴다. 전쟁은 언제나 늙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보내는 행동들이었다.” 이 소설은 차별의 시대에 남아공을 배경으로, 백인으로서, 그리고 할머니로서, 힘을 가진, 또 힘이 없는 한 사람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