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자들의 황야 하지은의 낮과 밤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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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입 모양을 보고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지. 그 신부가 마지막에 내게 뭐라고 말하더냐. 분명히 목숨을 구걸했을 테지?"

"아뇨. 무지 건방진 말을 지껄이던데요.

형님의 죄를 사하겠다고요."


불길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동시에 어둠처럼 몹시 차가운,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을 끌어다 내면에 집어넣기라도 한 듯 악독한, 악을 찬미하는 수많은 사람이 따라다니는, 그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며 복종과 두려움을 강요하는 자. 그의 이름은 베르네욜이었다.


처형을 기다리던 베르네욜에게 찾아온 한 신부. 처형이 집행될 도시의 가장 큰 성당 주인이며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둘은 잠시 마주 보다 대화를 시작한다. 신부는 베르네욜에게 후회하지 않느냐 물어보았고 둘 사이엔 침묵이 이어진다. 그러던 와중 바깥에서 총성이 들린다.


신부는 간절한 손길로 베르네욜을 붙잡는다. 신부의 손길이 닿자 혐오감으로 굳어진 얼굴을 하는 베르네욜. “내게 매달리는 건가, 신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이 순간 신이 아닌 내게?” 신부는 무언가 말했지만 배에 총을 맞아 입에선 피거품만 나온다.


무법자들의 도시 그라노스에 도착한 라신. 선교 봉사를 떠맡게 된 바드레 수사와 함께 라신은 한때 베르네욜과 친했었지만 지금은 복수하러 떠난다는 아버지를 찾아 이 땅에 발을 들였다. 바드레 수사에게 베르네욜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라신은 베르네욜을 도와주고 싶다 한다.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올바르고 강한 사람이 되도록 돕겠다고. 과연 라신은 베르네욜을 바른길로 이끌고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


낮과 밤 시리즈의 대미답게 넷 중 가장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황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에 회황색의 분위기를 예상했으나 이 이야기는 흑백으로 전개된다. 라신, 바드레 수사, 테사르, 베르네욜, 그리고 다른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며 읽다 보면 어느새 본편이 끝나 있을 것이다. 신과 복수, 선과 악, 그리고 사랑이 담겨있는 처절한 복수극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해본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황금가지 #오만한자들의황야 #하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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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선혈 하지은의 낮과 밤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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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밤을 그저 한 가지 검은색으로 볼 때 남자는 별 주위의 밤과 달 주위의 밤, 지면 근처의 밤과 가장 멀리 있는 밤, 이쪽에서부터 저쪽까지의 밤을 모두 다른 색으로 보았다. 그건 오직 그만이 구분할 수 있는, 보통 사람의 눈으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깊은 농도와 명암의 세계였다."

잔인할 만큼 합리적인 민족 쿠세인. 대제국 쿠세의 황태제 레아킨은 색을 보지 못하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레아킨의 마음을 뒤흔든 책은 바로 <호반 위 황금새>. 레아킨은 책의 저자 비오티.F를 만나기 위해 라노프로 떠난다.

레아킨은 라노프의 심판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예술로 유명한 라노프에선 심판관에 의해 모든 책이 검열당한다. 그러나 비오틴은 반동적인 사상과 거리가 멀었기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레아킨은 과연 비오티를 만날 수 있을까? 비오티를 만나면 레아킨은 감정을 느끼게 될 수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 <호반 위 황금새>의 '그'처럼 더없이 강하고 따뜻할까? 늘 사색에 잠겨 있는 듯 꿈꾸는 눈동자를 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까?"

꿈꾸지 않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 끝이 있는 <끝없는 이야기>. 첫 장(章) 이후엔 앞선 두 권과 비슷한 농도로 진행된다. 그러나 처음이 워낙 강렬해 이전 권들보다 수월하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로맨스 판타지와 정통 판타지가 적절히 섞인 하지은 판타지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책을 매개로 하다 보니 부흐하임의 미텐메츠와 환상세계의 바스티안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 대한 애정이 한가득 담긴 판타지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어릴 적 발터 뫼어스와 미하엘 엔데의 세계에서 즐겨 놀았다면 이 책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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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자와 여름 하지은의 낮과 밤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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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화창한 하늘 아래 벽돌길을 걸으며 나는 다시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지도,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겠노라 맹세했다. 그 맹세는 놀라울 정도로 잘 지켜졌다. 그로부터 1년 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평화롭다 못해 심심한 도시 그레이힐. 경시청의 강력 3반 사람들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딱밤 내기를 시작한다. 부하들이 양쪽 팔을 붙잡고 상사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기려던 순간, "저, 신고할 게 있어 왔습니다만." 의뢰인이 등장했다.

조 마르지오 극장의 대문호 오세이번 경이 죽었다. 본격적인 사건을 수사하길 고대해왔던 주인공 레일미어 경위는 이번 사건에서 빠지고 싶어 한다. 짝사랑하던 세라바체에게 뺨을 맞았던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건을 담당하게 된 레일미어는 자신의 마음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과 사랑, 푸른 장미와 동화, 레일미어와 세라바체. 과연 레일미어는 범인도 밝히고 사랑도 지킬 수 있을까?

K-MOOC의 '추리소설의 인문학적 탐구' 수업을 열심히 듣는 요즘 하지은 작가의 추리소설을 읽게 되어 기대됐다.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에도 추리 요소가 없진 않지만 <눈사자와 여름>은 본격적으로 추리 타이틀을 내세운 작품이라 수업 내용을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영미권과 일본의 추리문학은 많이 읽어왔지만 한국의 추리문학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항상 정제된 번역체로만 접하다 누가 봐도 한국인의 것인 문체로 추리문학을 읽으니 신선했다. 하지은 작가 특유의 장르적 문법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유쾌하고 능청스러웠다. 추리와 로맨스를 적절히 배합한 이 책은 추리 장르를 읽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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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하지은의 낮과 밤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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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야 있나. 천천히 올라갔다 오지 뭐. 이놈의 비가 대신 그쳐 주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말이야.”

 

이야기는 롤랑 거리 6번가에 있는 기묘한 저택의 현관을 밟으며 시작된다. 낮은 건물들 사이 혼자 솟아있는 7층 저택의 각 층엔 보기 드문 독특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저택의 3층에 살고 있는 다정하고 성실한 바리스타 라벨은 그들 중 가장 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런 라벨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바로 소원을 이뤄 주는 것이다.

 

1층의 박제사를 시작으로 가난한 시인, 백작가의 하인, 죽음을 앞둔 두 노인들과 유명 의사까지. 라벨에게 소원을 말한 이들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건 현장마다 출몰하는 자칭 탐미 공작은 누구이며 라벨과는 어떤 관계일까. 보이드 씨는 대체 무엇을 하기에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져도 자신의 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인가. 라벨은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소원을 말하지 않길 바라는가.

 

그는 단지 높은 곳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은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감성적이어서 놀랐다. 고딕 장르 형식을 충실하게 따랐으나 대사나 소재 선택에 있어 한국적인 요소들이 잘 보여 재밌었다. 특히 2000년대 특유의 낭만적인 감성이 돋보였다. 분량이 꽤 되지만 대사와 서술의 적절한 분, 옴니버스식 전개로 막힘없이 술술 읽었다. 잔혹해서 아름다운 고딕 로맨스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두 말할 것 없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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