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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알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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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길이가 15센티미터 정도군요. 붉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초록색으로 된 기다란 것에 붙어 있네요."


2

"표면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어요. 주름이 잡혀 있군요. 음, 또 주머니가 다섯 개 달려 있는 것 같군요."


1, 2는 무엇을 묘사한 것일까?

두 가지 사물을 보여주고 무엇인지 물었을 때 이런 식의 답이 나온다면? '꽃'과 '장갑'을 보고 이렇게 답 한다면? 쉽게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시각인식불능증'을 겪는 사람은 사물을 이렇게 바라본다. 이들에겐 사물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대상을 구체적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범주적으로 파악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인 음악가 P는 인식불능증 환자다. 성악가였던 그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중 어느 때부터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뇌에서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에 일종의 종양이 생긴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그는 음악의 힘으로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이처럼 우리에게 낯선 여러 신경계 환자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년에 82세로 타계한 저자 올리버 색스(1933-2015)는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환자들의 사연을 책으로 펴내 인간의 뇌와 정신 활동의 불가사의한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글은 유려하고 문학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글이 감동을 주는 건 환자를 병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는 애정과 관심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인용된 아이비 맥킨의 말처럼 그는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 의사였다.


이 책에는 다양한 신경계 환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49세 지미의 기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해서 보낸 젊은 시절에서 멈춰버렸다. 그때까지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고 자신도 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지미의 문제는 바로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젊은 시절 이후의 삶은 매번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어 버린 지미의 경우는 뇌 유두체 신경세포가 알코올로 인해 파괴되어 나타나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진단된다.

색스가 지미를 만났을 때 이전 담당 의사가 보낸 진료 기록에는 "가능성 없음. 치매, 착란, 정체성 장애 증상 보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억 상실증을 빼곤 두뇌 회전도 활발하고 지적이며 호감을 주는 지미를 돕기 위해 색스는 그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고 그의 행동을 관찰한다. 지미가 성당에 앉아 있기를 잘 하는 것을 보고 색스는 그가 집중 상태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연속성을 체험함을 짐작한다. 결국 지미가 정원 가꾸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내 그에게 정원 손질을 맡긴다. 그의 기억 상실증은 치료되지 못했지만 지미는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영혼의 통합을 경험하게 된다.


다발신경염에 걸려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는 고유감각을 잃어버린 27세 크리스티나 역시 상상이 쉽지 않은 특이한 경우다.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그녀.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고유감각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과 방법을 터득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비틀대는 동작으로 어설프게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술에 취한 거냐?' '눈이 안 보이냐?' 등 모욕적 언사를 내뱉기도, 이상한 얼간이로 취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색스는 그녀를 "신경의 병마와 용감하게 맞서 싸운 이름 없는 영웅, 여장부"라고 부른다. 크리스티나의 경우는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동작이나 생각의 과잉이 갖가지 강박 현상으로 나타나는 투렛 증후군, 계속해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관자엽 발작이 회상과 환각을 일으키는 사례, 저능아이지만 시적인 재능을 갖춘 리베카와 2000곡 이상의 오페라를 기억하는 마틴의 이야기, 자폐증, 중증의 정신박약증 진단을 받았지만 '무의식적인 알고리즘'이 내재된 '수의 천재' 쌍둥이 형제, 자폐증 환자이지만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재능을 가진 호세의 이야기 등 책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환자를 기계처럼 대하는 의사가 많아진 시대에 색스의 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 책은 모든 의사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듯. 일반 독자도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있는 게 많다. 무엇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정신 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되돌아 보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정신 세계를 살고 있는 이들을 단지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정신 장애' 진단을 받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궁금해하게 될지도.

색스는 "본래의 자기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살려나갈 수 있는 무대가 이 사회에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들이 자신의 세계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색스의 책은 감동적인 서사로 독자를 그 이해의 세계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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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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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계의 미로에 빠져들게 만드는 유혹적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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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톡카톡 - 읽다 떠들다 가지다
김성신.남정미 지음 / 나무발전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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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독서와 서평에 관한 책들도 성황을 이룬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한탄이 한쪽에서 들리고 있는데 이렇게 책과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어쩌면 책을 점점 더 읽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책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부르짖음은 아닌지.


이런 와중에 새로운 형태의 서평집이 출현했다. 획기적인 기획으로 만들어진 책 <북톡카톡>은 강력한 독서 자극제다. 출판평론가 김성신과 개그 우먼 남정미가 나눈 카톡 대화, 책에 대한 수다가 책으로 묶였다. 우리 시대 최강 소통 매개체인 카톡을 사용한 수다 서평은 카톡 대화의 수준이 업그레이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미난 삽화를 곁들인 대화체 서평의 특징은 재미와 의미다. 좋은 책의 기준이 재미와 의미라면 이 책은 이 기준을 거뜬하게 충족시킨다. 두 사람의 재담은 재미를 제공하고 내용의 깊이는 의미를 선사한다.


총 33권의 책을 5장으로 나눠 소개하고 중간중간 '뭔가로 만들어주는 책10+1'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별 도서를 추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웃기는 사람' '클래식 애호가'로 만들어주는 책, '연애 달인'으로 만들어 주는 책  등이다.(귀가 솔깃해지는가?)


5장의 제목은 가각 '봄' '놂' '앎' '변함' '깨달음'이다. 제목에 걸맞게 책을 선정한 듯. 하지만 항상 걸맞는지는 모르겠다. 예를 들어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가 '봄' 장에 들어간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편의상 분류한 듯 하고, 사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저 책장을 넘기며 재미난 수다를 듣고, 책을 소개받으며 읽어보고 싶은 마음만 생기면 된다.


이 책은 현 시대 흐름에 걸맞는 신선한 기획이다. 게다가 책에 대한 두 사람의 개인적 견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친절한 소개는 독자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소개책들 또한 책과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알려준다. 책 읽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독서 의욕을 자극하는 이 재미난 수다를 듣고 나면 책이 훨씬 다감하게 다가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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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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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69년에 출간된 루이자 메이 올컷(1832-1888)의 <작은 아씨들>은 영화로도 유명하다. 1930년대부터 1994년 위노나 라이더를 주연으로 한 질리안 암스트롱 감독의 영화까지 여러 번에 걸쳐 영상으로 옮겨졌다. 오래 전에 영화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네 명의 자매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이야기였던 것으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이제 소녀시절이 아득해진 나에게 이 소설이 어떻게 다가올까, 책을 읽기 전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손에 쥐고 1,2권 합쳐 800페이지가량 되는 소설을 읽으며 내내 즐거웠다. 스토리텔링의 전범이 될 만한 서사적 전개는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소녀들의 성장 소설로 이해되는 이 작품에서 네 명의 자매는 제각각 특징 있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누구보다 부각되는 인물은 둘째인 조 마치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조는 남자 같은 성격, 자유분방함,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는 열정과 이야기꾼으로서 뛰어난 상상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소설은 보부와르를 비롯해 거트루드 스타인, 조이스 캐롤 오츠까지 현대의 여성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는데, 무엇보다 조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진취적 모습 때문이 아닌가 싶다. 1950년대 한 남성 비평가로부터는 “분석이 거의 필요 없으며 분석의 여지가 없는 책”이라고 평가절하되긴 했지만 이 작품은 여성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내용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페미니즘 문학의 선두에 위치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에게 항상 호평만 받은 것은 아니다. 책이 쓰인 당시의 여성적 삶의 구속과 예술적 자유와의 딜레마를 잘 그려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조가 아버지뻘 되는 독일인 교수와 결혼하는 결말을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루이자의 퇴보”라고 보는 비판적 관점도 있다. 조가 결혼과 함께 학교를 만들어 사랑과 대안적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워낸다는 이상적 결말이 조의 작가적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 비평이 대체로 조의 행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의 주목을 끈 것은 작은 아씨들의 어머니인 마치 부인이었다. 내 자신이 이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이어서인지 모르지만, 소설 속 어머니의 존재감이 크게 다가왔다. 11살 막내 에이미, 13살 베스, 15살 조와 첫째인 16살 메그가 성장하여 결혼하기까지(베스는 일찍 죽는다) 약 20년에 걸친 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필요할 때마다 개입하여 지혜와 사랑으로 자식을 인도하는 마치 부인의 모습은 우리 시대 엄마들에게 여전히 큰 영감을 줄 수 있다.

 

마치 부인은 말과 행동으로 지혜를 보여준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아이들에게 이미 가지고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를 통해 일깨워주고(114), 사람을 평가할 때는 외모나 조건보다 태도와 대화에서 드러나는 장점을 보아야 한다고 일러준다(155). 자신의 끔찍한 성질을 자책하는 조에게 인간은 모두 유혹에 약하며 ‘내면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자신의 약점을 경험으로 들려주는 솔직함을 보이기도 한다(169). 언제든지 아이들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170), 딸들이 좋은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길 바라는 모든 엄마들의 소망을 공유하지만 돈이나 조건을 보고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차라리 노처녀로 살아도 좋다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엄마다(198).

 

마치 부인의 행동 또한 지혜롭다. 방학이 되고 휴가를 맞은 아이들이 1주일간 자유롭게 제멋대로 생활하도록 ‘빈둥거리기 실험’을 허락함으로써 노는 것에 지쳐 스스로 일을 찾아가게 만드는 지혜는(219) 끊임없이 아이들을 관리하려 하는 우리 사회의 엄마들에게 특히나 필요해 보인다. 의도적으로 계획된 엄마의 하루 휴가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독립성을 키우고 가족의 안락을 위해서는 각자가 해야 할 몫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처방으로 이용된다(233). 마치 부인은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237), 힘이 들 때도 항상 희망을 갖고 몸을 바쁘게 움직이라고 조언하며(313), 어려운 일에 처해도 올바른 방법으로 도움을 구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364).

 

로리와의 관계로 떠나 있기를 원하는 조에게 자유를 허용해 뉴욕으로 갈 수 있게 하고(2-156), 결혼한 큰딸이 아이를 낳고 남편과 소원해지자 부부생활에 대해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들려주며(2-245), 베스를 잃은 조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곁을 지켜주며 (308) 조의 재능을 알아보고 글쓰기를 해보라고 격려한다(312). 실제로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어머니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분방해 서로 통하는 면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자신의 책을 어머니에게 헌정하였고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끝까지 보살폈다고 한다. 소설도 조가 엄마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정말 엄마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인내는 평생토록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예요.”

 

우리 사회는 가족 해체와 불행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다. 부모교육, 엄마 교육, 아버지 교육의 성행은 자식과의 관계에 서툰 부모가 그만큼 많음을 반증한다. 이 책은 페미니즘적 소설로, 또는 작가적 꿈을 키우는데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읽힐 수 있지만 부모 교육서로도 좋은 소설이다. 마치 부인의 지혜와 사랑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지혜로운 엄마가 필요한 시대. 엄마예비생들과 엄마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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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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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소설을 이전에 몇 권 읽었었다. 하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다. 작년에 <소년이 온다>가 출간되고, 이 소설이 80년 광주를 소재로 삼았다는 걸 어렴풋이 듣고도 바로 책을 사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작가와  광주가 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는 소설과 섬세한 필치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작가가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김영하 작가가 한국인의 멕시코 이주사라는 역사적 소재를 소설 <검은 꽃>으로 풀어냈던 것이 예외였던 경우와 비슷했다. <검은 꽃>은 김영하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역작이었고, 이제 <소년이 온다>는 "한강을 뛰어넘는 한강"의 역작으로 남게 되었다. 책을 손에서 일순간도 내려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야 했다.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건 어쩌면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아버지가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일때 가르쳤던 아이. 소년의 이름은 동호였다. 작가네 가족이 서울로 올라가고 이전에 살던 집에 동호네가 이사들어와 살았던 인연. 그 집에 세들어 살았던 동호와 같은 또래의 정대. 이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80년 5월 광주 학살의  환란 중에 목숨을 잃는다. 아이와 아이 가족과의 인연 때문에 이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작가. 이들에 대해 글을 쓰게 된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한 소녀의 주검일지도 모르겠다. 5.18 이후 2년 뒤 열두살인 작가는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사진첩에서 소녀를 보았다. "그 여자애는 뺨과 목이 총검에 찢긴 채, 비스듬히 한쪽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소설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을 밝히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과 부모와 친척들의 대화로부터 엿들었던  끔찍한 얘기들, 옛 집과 동네 답사, 망월동과 국립 신묘역 방문, 자료 수집과 유가족과의 만남을 거치며 광주를 기억했다. 악몽에 시달리며 이들의 시간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추체험하고 글로 토해놓았다. 소설은 24년 전 무구하게 죽어간 소년과 그의 친구와 시민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비명에 간 어린 소년을 위로하고, 그때 죽거나 살아 고통받은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한다. 허망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끔찍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 같은 삶을 살았던 이들, 지금도 과거가 악몽인 사람을 기억하게 만든다.


친구 정대와 거리에 나섰다가 군경의 발포로 정대는 그자리에서 죽고 동호는 도망친다. 죄책감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다 상무관에서 시체 관리일을 보조하던 동호는 결국 도청 진압 때 목숨을 잃는다. 상무관에서 알았던 은숙누나, 선주누나, 진수형은 살아남지만 그 이후 이들의 삶은  지옥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와서 결국은 자살하게 되는 진수, 대학에 진학하지만 중퇴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며 고초를 겪는 은숙,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을 묻어두고 살아가는 선주, 일찍 어린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리움을 가슴 속에 안고 살아온 동호 엄마. 이들 모두 동호를 기억한다. 자신의 삶이 비록 고통스러워도 그들에게 동호와의 기억은 힘을 주기도 하고, 고통의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작가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끔찍했던 80년 광주의 참상을 되살려낸다. 하지만 섬세하게, 상처를 어루만지듯, 이들에게 다가간다.


소설은 '너', '당신'이라고 인물들에게 말을 건다. 독특한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마치 독자 자신이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가 그들을 잊지 말고, 그들의 고통을 느끼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함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걸까. 초혼(招魂)의 글쓰기를 통해 죽음을 애도하는 소설 <소년이 온다>. 그렇게 '돌아온 소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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