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얼굴들
황모과 지음 / 허블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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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평: 허블이 작년에 우빛속으로 sf 무대를 뒤집어 놨다면 올해는 밤의 얼굴들로 sf 무대를 찢어놓는구나.
추천 독자층: 정세랑, 김초엽,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시는 분들. 따뜻하고 간결한 장르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

_책 속 밑줄 소개

p.51
서늘한 내 심장의 동토에 묻어두면 어떤 감정이라도 조용히 썩어갔다.

p.58
나처럼 어딘가 고장이 좀 나서 삶에 수반되는 귀찮은 수난들을 못 본 척할 수 있는 사람만이 버틸 수 있었다.

p.90
한순간도 일탈하지 않고 집요하게 고여 있는 시공간. 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 같다. 나는 반복되는 무력함이 정신이 얼얼하다.

p.178
엄마의 비겁한 인생이 고스란히 내 것 같았어요. 저는 그 인생에서 나온 더 불완전한 인생이었으니까요. 엄마와 저는 불행 공동 채무자였어요.

p.179
드라마가 되기엔 너무 시시하고 뻔한 불행이었나 봐요.

_
우빛속이랑 비교를 하겠다. 왜냐면 같은 출판사고, 같은 폰트와 같은 글씨 크기와 같은 재질의 종이를 쓰니까.
우빛속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람들) 우리가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세계에 던져놨다면, <밤의 얼굴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경험해본 세계에 던져놓았다. 이 이야기에 작동하는 과학 장치들은 세계관이 아니라 소지품으로 형상화 한다. 그래서 김초엽을 읽을 땐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일반적인 인물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도 저 상황에 처하면 저렇게 느끼겠다, 하고 공감한다. 반면에 <밤의 얼굴들>을 읽을 땐 나의 과거와 나의 기억을 더듬게 된다. 이미 우리가 모두 겪었고 겪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우리가 한 번 쯤 생각해봤을 법한 사각지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이 쉽게 읽힌다. (물론 작가님이 기가 막히게 군더더기 없는 문체를 구사하시기도 한다.)

<밤의 얼굴들>을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면 "진실, 기억, 기록"이다.
SF 요소가 철저하게 이야기를 여는 도구로 사용된다. (테드창처럼 SF 설정을 먼저 상정하고 그 설정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까? 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다.) 역사 속에 묻힌 진실을 추적하는 글도 있고, 내 안의 기억을 뒤집고 해석하여 진실을 탐구하는 글도 있고, 서로의 입장 차이로 진실이 충돌하기도 하고, 감정을 기록하기도 하고 그 기록을 헤집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책의 수록 단편들이 빠짐 없이 재밌었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찰떡같이 다뤘기 때문이다.

불친절한 현실에 질려버린 인물의 냉소를 섬세하게 다루는 글을 좋아한다. 그 인물의 냉소와 다른 인물의 다정함이 충돌하는 상황을 좋아한다. 냉소에 축축하게 젖어있는 인물의 삶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드는 결말을 좋아한다. 딱 선선하고 쾌적한 정도의 통풍이 가능한 감정 상태를 좋아한다. 근데 이게 다 있어.

_SF 얼리어답터들에게! 이 책은 빨리 살수록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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