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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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궁 안에 여유도 없이 웅크려 따뜻한 양수 안을 헤엄치던 어린시절을 종종 추억한다. 어머니는 이제 더이상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며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와인을 나눠 마시며 취하고 팟캐스트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어머니는 지루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가 죽음의 벽을 지날 때 마다 '나'의 무른 두개골을 뚫어 그의 열등한 유전자를 '나'의 뇌에 살포할까 걱정한다. 그녀는 아둔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그 남자와 아버지의 살해를 모의하고 있다. '나'는 늘 존재(to be)와 그 사이를 떠도는 바깥 세상의 온갖 것들을 상상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딱 한 번 탯줄을 목에 감긴 했지만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잊어본 날이 없다.

아아, 나는 호두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셰익스피어, [햄릿]

넛셸. 뇌를 닮은 호두껍질 속. 이야기는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있다.'는 사색으로 시작해 사색으로 끝난다. 구석구석 삶의 아포리즘이 가득이다. 하지만 껍질 속 '나'의 왕국에서는 사색만 가능하다. '내'가 반드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사색의 왕국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 모든 것들을 경험하는 것. '나'는 브루주아적 삶을 꿈꾸고 빈민이 되는 것을 걱정했지만 결국 악몽이라 여겼던 감옥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양막을 제 손으로 찢어 경험할 수 있는 [삶]으로 몸을 던진다. 작가는 삶에 대한 태아의 열망을 풀이하며 그것이 나에게도 본능이었음을 상기시키고 다시 돌아와 질문한다. 너는 '살아있는-태어나 있는' 거냐고.
불현듯 살펴보니 양 손에 호두가 한가득이다. 지레 걱정하고 겁을 먹는다. 태어나지 못한 생각들이 [삶]앞에 누워 으름장을 놓는다. 달아나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손 마저 내밀 수도 없어 도무지 어쩌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사색의 왕국에서 퉁퉁하게 살 오른 절대왕 노릇이나 하고 있다. 옛날 옛적, 자신을 태양이라 여기던 왕의 웃을 수 없는 일화들과 그의 죽음에 울리던 환호를 떠올린다. 생각에 갇혔을 때 은근하게 다가와 얼굴을 핥는 독선과 차가운 종말의 풍경을 환기한다.
한밤중의 양치기에서 은퇴하고 장난감 가게에 이력서를 넣을까 싶다. 여름 밤이 문제인지 양이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여하간 몰아넣기에 종일도 부족한 지경이다. 당분간 호두까기 인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힘 조절은 필수다.

ⓒ2017.bam12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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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현재 상태에 괴로워 한다ㅡ그것이 의식이라는 선물이 주는 고난이다. p.45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ㅡ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p.54

사랑이 식고 결혼이 무너지면, 그 첫 희생자는 정직한 기억이지. 과거에 대한 온당하고 공정한 회상. 그건 너무 불편하고, 현재를 지나치게 비난하니까. p.96

권태는 희열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인간은 기쁨의 해안에서 권태를 바라본다. p.104

죽은 자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p.135

하지만 나조차 안다. 사랑이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권력이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연인들은 갈망뿐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첫 키스에 이른다. p.166

삶의 얼마나 많은 것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잊히는지 나는 이미 잘 안다. 대부분이 그렇다. 현재는 주목받지 못한 채 실감개의 실처럼 우리에게서 풀려나간다. 특별할 것 없는 생각들이 헝클어져 수북이 쌓이고, 존재의 기적은 오래도록 방치된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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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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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쉬지않고 째깍거리는 시계를 품고 살아간다. 초침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코 앞의 미래에 대한 집중만을 강요하며 역사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경험의 부산물들을 긁어모아 보다 나은 내일을 가늠하기 위한 과정. 그렇기에 오드리에게는 역사가 없다. 불쾌한 현재는 두려움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그녀의 '역사'가 되지 못한다. '나'라는 정체성은 언제든 탈바꿈될 수 있기에 성찰은 요원해진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거침없다는 묘사도 삶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역사에서 예상해볼 수 있는 참과 선악의 경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현재의 거짓과 위선 혹은 위악 역시 구분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끝내 오드리의 진심은 그녀의 이름들과 함께 바다 한가운데로 사라진다. 여하간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역사로 쓰일 '가능성'이 다분한 진실의 옷깃마저 낚아채 바닷속으로 마저 끌고 가버린다. 존재의 진실따위는 그녀가 미처 갖지 못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바다가 희석해 줄 것이다.
이렇게 투영된 모호함의 자유가 조지를, 등장하는 몇명의 남자들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의 누군가를 매혹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딘가의 땅에서 생경한 존재에 대한 저항과 끌림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낯선 스스로에게 안도하고 도취된 채 묵은 존재의 휘발을 기꺼이 축하하며.

ⓒ2017.bam12shi

1. 취향은 아니지만 가볍게 읽기 좋다. 미국 작가의 미국 소설이 미국 영화화 된다면 캐스팅에 따라 꽤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듯.

2. 국내판 제목은 '아낌없이 뺏는 사랑'이지만 원제(The Girl with A Clock for A Heart)의 뉘앙스와 주체를 살려 지었다면 하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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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세계문학의 숲 47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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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 속에서 다투는 두 개의 본성 중 어느 하나가 나 자신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오로지 내가 근본적으로 그 둘 다이기 때문이야. -p.91

약물은 악하지도 신성하지도 않지. 그 약은 그저 내 기질의 감옥문을 흔든 것뿐이고, 그 바람에 갇혀 있던 것들이 필립피의 포로들처럼 뛰쳐나왔을 뿐이야. 그 순간 내 덕성은 잠들어 있었고, 야망에 불타 눈을 부릅뜨고 있던 악이 신속하게 기회를 꿰찬 거지. -p.95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의 스스로가 마음에 들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세상과 사람과 관계를 의식하며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나. 우리는 무의식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나 행동으로 종종 후회하며 고뇌한다. 때때로 의식적이지 않은 상태만이 나의 본질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며, 그런 나를 누군가가 기꺼이 받아들여주길 원하기도 한다. 하이드가 악에 한없이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묘사된 것은, 정제되지 않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길 원하는 것 역시 감정의 폭력과 다름아님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이드를 감추기 위해 불안에 떨다가 결국 지킬의 존엄을 지키고자 독약을 삼키는 그를 그려본다. '관계안에서 노출하는 나' 역시 나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임을 의식하며, 나의 욕망은 어떤 모습을 추구하는지 그 너머의 근원 또한 들여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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