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안평대군의 이상향, 그 탄생과 유랑
김경임 지음 / 산처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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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쪽에 달하는 두툼한 책이건만 박학다식한 저자의 안목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필력이 독자의 눈길을 잡아둔다.

작가가 조명하려 했던 건 <몽유도원도>에 담긴 안평대군의 꿈과 삶이었다.

 

안평대군은 누구인가?

세종의 셋째아들로 詩書畵에 능해 일찍이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고 古書畵의 수집가이며 藏書家로 학문과 예술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특히 조선 최고의 명필로 일컬어지는 안평대군은 강렬한 정신, 빼어난 기상, 담박하고 선하며 를 즐기는 진실하고 고상한 인물이었다.

아들의 학문과 인품을 사랑한 세종은 그의 당호를 <匪懈堂>이라 지어 하사했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비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도 경계한 세종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형 수양의 음모에 휘말려 그는 단종을 도운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는다(1453.10).

영정조 대에 비로소 명예를 회복, 장릉에 단종 제일의 충신으로 이름이 올려졌다.

 

작가는 조선 삼절로 칭해도 좋을 안평대군의 작품과 그의 자취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허망함과 비애감에 젖었을 것이다. 세조와 당시 기록관들이 얼마나 철저히 증거인멸에 힘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아마도 그 당시 상황을 소상히 기록했거나 풍자했기 때문에 남겨둘 수 없었던 걸까?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4)>는 안평대군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그림일까?

세종 말년, 안평대군은 꿈에 무릉도원을 발견한다. 이를 안견에게 이야기하니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해 온다. 그리고 어느 날 실제로 백악산 기슭에 꿈에 본 무릉도원과 흡사한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무계정사>를 짓는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안평대군의,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에 은둔하려는, 그럼으로써 사직을 지키겠다는 속내를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목을 쓰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집현전학사들, 고관대작, 고승 등 21인의 찬문을 받아 몽유도원도를 완성한다.

일본학자조차도 그것은 호화 현란한 연판장이다라고 감탄(?)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세조의 등극과 함께 유배되거나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최고의 걸작품이라 일컬어지는 우리의 일급문화재 <몽유도원도>는 어디에 있나?

작가가 계유정난 이후 <몽유도원도>가 유실되어 일본에 정착하기까지의 행적을 좇은 기록은 추리소설을 연상시킬 정도로 흥미롭다. 작품이 어떤 경로로 그곳까지 가게 되었나를 알게 되었을 때 약탈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일제식민지 역사가 되살아나는 듯해서 울컥하는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약탈된 문화재는 제국주의 시대 강자들의 단합으로 이제는 돌려받기 어려운 현실을 개탄할 수밖에 없는가?

 

황금기를 구가했던 조선 초 세종대왕 때 그 중심에 있던 두 존재-

지금은 어디에서도 안평대군의 자취 찾을 수 없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만질 수 없는 <몽유도원도>는 언제쯤 우리 앞에 그 존재를 드러내어 한민족의 자존심을 세워주려나?

 

입증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안평대군의 삶을 조명하려 시도한 점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 출중한 재주와 여건을 타고 났음에도 수양의 왕위찬탈의 야욕에 희생되어 사라져간 한 고매한 인간의 슬픈 넋을 위로하고자 하는 작가의 내면이 읽혀져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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