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백승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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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어휘, 생생한 묘사, 유쾌한 표현들...

그 어떤 문학 작품에 견주어도 재미면에서 빠지지 않는다.

게다가 군데군데 보이는 작가의 유머나 통통 튀는 가치관들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아는 중국어라고는 '니하오'밖에 없는 언어학자가 중국 상하이에서 1년간 지내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엮은 이 책은 곳곳에서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를 보여준다.

외국인이 여행객이 아닌 거주인으로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을 바꿔야 한다는 표현은 처음 낯선 나라에 발을 딛은 자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아메리카노'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 그곳의 스타벅스에서 카페인을 쟁취하기 위해 수십번 동영상을 돌려 보며 연습하고, 입으로 외며 매장까지 이동하는 장면, 끝내 점원과의 소통으로 몸짓을 사용하고, 그 가리키기 신공으로 치즈케이크까지 득템하는 초능력을 선보일때는 물개 박수를 쳐대며 함께 뿌듯해 했다.

오래된 공간에 그 공간과 연관된 중국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하고, 이야기들을 풀어 낼때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한다. 언어학자라고 하더니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먹는 일에 최적화된 공룡의 입과 비교해 보잘것 없는 인간의 입은 먹는 일 보다는 말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디자인 되었다며 단박에 나를 설득한다.

'상하이 하다'라는 동사를 몸소 체험하고 그 일화를 바탕으로 나에게 건넨 설명은 완벽하다. 혼자였고, 중국어에 서툰 이방인이란 이유로 사기의 대상이 되었던 저자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 덕에 나는 '상하이 하다'라는 동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것이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졌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배웠고,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정부(당)라는 이름으로 항공편도 취소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민들은 그 단어 앞에서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나의 중국'이란 미명하에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중국인들이 정부에 보내는 맹목적 지지의 뿌리를 여기서 발견한 느낌이다.

국가가 만든 박물관의 기능 중 하나는 그 거대함에 관람객이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의 거대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란 사실을 처음 배웠다. 또한 박물관 안에 전시된 유물들을 통해 수많은 개인의 역사와 기억은 소거되고, 빈 자리에 국가의 기억이 이식되며 그렇게 편집된 채로 우리에게 보여진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시간과 공간, 신화와 역사를 넘나들며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정말 쉬워서 부담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작가의 글쓰기 능력에 감탄한다. 언어학자라 그런가??? 4·3 사건을 겪은 제주가 키운 소년은 이렇게 유쾌하고 명랑하게, 무엇보다 쉽고 재밌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 되었다. 언어학자이지만 문맹인으로 1년을 버티는 혼자만의 비밀 프로젝트를 무사히 완수하고 돌아온 그를 환영하며, 앞으로 그의 저작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할 것이다. 이미 그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언어를 잃어버린 외국인은 제대로 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외국인이 된다는 것은 몸을 바꾸는 일, 즉 변신을 하는 일이다. - P17

가리키기가 가능하려면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마음을 읽는 것이란 ‘나와 상대방이 모두 공동으로 한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다른 이의 관점에서 그 사물을 보는‘과정이다. - P23

가리키기는 인간과 인간 언어의 시원인 셈이다. - P24

사람들은 언어가 촘촘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언어란 매우 성긴 그물이다. 세계는 아날로그이지만 언어는 디지털인 까닭이다. - P33

어떤 단어든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독립된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주제로 묶인다‘는 뜻의 옴니버스적이다. - P39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새로운 디폴트 값을 찾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 P48

인간의 입은 ‘먹는 일‘보다는 ‘말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 P90

내가 어떤 음식을 언제 누구와 먹는가는 그의 정체성과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드러낸다. - P94

미로는 ‘헤매기‘위해 만들어지고, 미궁은 ‘빠지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 같아도 미궁은 그 안에 들어온 이들을 결국 목적지로 정확하게 인도한다. - P134

뛰고 난 후의 나는 뛰기 전의 나와 아주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 P164

어떤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과 생각들을 같이 끌고 온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자신만의 우주를 끌고 와서 길 위에 그것들을 포개 놓는다. 그렇게 그 길은 각자에게 모두 다른 길이 된다. - P174

거리에 널려 있는 빨래는 일종의 지극히 사적인 일기이고, 거리는 사적 기록이 전시된 도서관이 된다. 사적인 일기들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는 이상한 도서관 - P184

이 나라는 마오의 욕망과 자본주의를 내재화한 인민의 욕망이 끈끈하게 엮여 서로 복화술사처럼 대화하는 곳이다. - P205

국가가 만든 박물관의 기능 중 하나는 관람객들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박물관의 거대함을 알리는 데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거대함은 그 박물관을 지은 상상의 공동체(국가)의 거대함과 위대함을 보여준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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