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작고 크다 (책 + 정규 8집)
루시드 폴 지음 / 예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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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그동안 잘 지냈나요.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 〈안녕〉은 루시드 폴의 여덟 번째 정규앨범의 첫 번째 트랙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듯 에세이집도 함께 출간했다. 번역서를 포함해서 그가 낸 아홉 번째 책이다. 책 안쪽에 붙어 있는 시디와 책 첫 장(章)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트랙 리스트”, 그리고 중간중간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사진들만 보면 양장한 음반 부클릿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책 내용에 대한 아무 사전지식 없이 이 책을 만나면 이번 앨범에 담긴 곡에 대한 설명이 빼곡히 담긴 책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 책의 정체(正體)를 음반과 도서 그 사이 어딘가에 둘지도 모르겠다. 그의 8집 발매공연의 제목이 “읽고, 노래하다”라니 책 제목과 앨범 제목이 같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책은 트랙 리스트 포함 총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는 그가 제주에서 신출내기 농부로서 살아온 이야기, 아내와의 결혼생활, 반려견 보현과 얽힌 에피소드 등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장 “땅으로 내려온 날개”에서는 그가 살면서 겪었던 새에 얽힌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 함께 죽은 새를 묻어 주었던 일, 날개 한쪽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새끼 제비를 구조대원에게 보내던 일, 그리고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많은 새들에 대한 기억. 그의 첫 번째 정규앨범에 수록된 〈새〉 또한 이별에 관한 노래인데, 새와 얽힌 기억들이 주는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과 새가 아무리 가까워진다 해도, 인간의 힘만으론 절대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하늘과 이런 하늘에서 더 자유로운 새, 이 둘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은 결국 헤어짐으로 귀결되는가 보다.
네 번째 장 “선물”에서는 그가 동화를 쓰고 아내가 동시를 쓰게 된 선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읽다 보면 결정적인 사건이나 특별한 이유를 몰라도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 있다. ‘영혼이 닮았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세 번째 장 “손을 잡는다는 것”과 다섯 번째 장 “농부의 취향”, 여섯 번째 장 “지난여름 그리고 겨울”에서는 자연을 대하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농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철학’이나 ‘신념’ 같은 거창하고 심오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취향’이라는 단어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는 나무를 정성스레 돌보는 것일 뿐이고 그 결과물로 열매를 얻으면 감사하게 거두어들인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가 바라는 음악이 잘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소리를 돌보아, 그 결과물인 음악을 '거두어들인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장 “재료라는 것은”과 “대구와 피조개”에서는 그가 만나는 식재료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내와 즐겨 해 먹는 요리들, 어렸을 적 간식으로 즐겨 먹던 명태에 대한 기억, 귀한 생선이라며 대구철만 되면 큰 선물로 대구를 보내시는 어머니, 기억 속에 우람한 크기로 자리매김한 피꼬막과 고향 바다. 누구나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다 보면 유난히 음식과 얽힌 추억이 많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때 먹었던 음식을 지금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같은 맛이 안 난다고들 이야기한다. 살아온 시간만큼 먹어 온 음식이 쌓이고 쌓여 혀끝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이 모두 뒤섞여 버린 것일까. 저자에게도 음식은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이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함이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스위스 로잔에서 2008년까지 생명공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다 돌연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와 앞으로 모든 학업을 포기하고 음악에만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하지만 책을 보다 보면 화학식을 이용해 직접 액비를 만들어 쓰거나, 요리를 ‘실험’에 빗대어 생각하는 모습 등 그의 숨길 수 없는 ‘공대생’의 면모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책 속에는 그의 모든 크고 작은 일상이 담겨 있다. 그가 농사를 지을 때는 귤밭에서 귤이 나고, 음악을 할 때는 노래의 밭에서 노래가 난다. 그의 표현대로 ‘꽃이 오고’ 나면 그해의 열매가 맺는다. 이번 여덟 번째 앨범과 이 책 또한 그가 수확한 열매다. 로즈우드와 레드시다로 지은 커다란 기타 같은 그 오두막에서 그는 숲 지킴이처럼 음악을 만들어 길을 낸다. 그리고 그 길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산책하자고 손짓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함께, 비가 오면 비 냄새를 맡으며 기꺼이 그의 산책길에 동행하려는 사람에게 은빛 열차의 차장이 말한다.
“모두,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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