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강영숙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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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도서관에서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를 읽었다. 여전히 불편하고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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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랜덤소설선 14
강영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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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품이란? 그것을 다 읽고 난 후 마음 속 어딘가에 뭉클하게 도사리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똬리와 같다. 그것은 기쁨이다. 최근 아주 우연한 기회로 강영숙의 소설 <리나>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귀향>을 몇 시간 시차로 접하면서, 오랜만에 이런 기쁨을 맛보았다. '무엇이 과연 작품인가'?에 대한 보다 명료한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작품을 접하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사지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그 짜릿한 무기력함이란! 감히 말하자면 이 두 작품은 현대 미학이 가고자 하는 지향점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다.두 작품의 내면에는 머무름과 길 떠남, 상처와 치유, 비극과 유머가 존재한다. 까칠하기 이를데 없는(현재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으나 예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어떤 ‘통찰’들이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이 지구 반대편에서 거의 동시에 작업되었다는 점이다. 동북아시아의 한 여성작가가 쓴 소설 <리나>는 2005년에 발표되기 시작하여 2006년 9월 출간되었고, 서유럽의 남성 영화감독이 만든 <귀향> 또한 2005년에 만들어져 2006년 9월 개봉되었다. 이 시간적 우연의 일치가 한 독자의 마음을 달뜨게 만든다.

   그리하여, 할머니 이렌느, 엄마 라이문다, 딸 파울라, 이모 쏠레 그리고 엄마의 고향 친구 아구스티나가 펼치는 한바탕 사건들로 꾸며지는 영화 <귀향>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을의 여자들이 바람 부는 해변 가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닦고 있다. 돌로 된 무덤과 비석을 닦고 있는 장면이다. 눈부신 태양과 엄청난 바람이 묘지에 드리우고 선글라스를 쓴 늙은 여인에서부터 파울라와 같은 소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무덤을 청소하고 있다. 무덤은 국경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다. 늙은 과부의 주름살처럼 치마가 강풍에 접히고 태양은 다시는 무덤 속에 들어가지 못하겠노라면 내리 버티고 있다. 그렇게 할머니의 묘지를 청소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파울라는 자신을 강간하려는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라이문다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옆집 식당의 냉동실에 사체유기를 하고 주인이 가게를 비운 틈을 타 외지에서 온 영화촬영 팀에게 장사까지 한다. 우여곡절은 거기에 끝나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 이렌느가 쏠레에게 나타나면서 이 다섯 여자의 드라마는 쓸쓸하지도 거창하지도 않게 흘러간다.

   한편, 전직가수 할머니, 봉제공장 언니, 아들이면서 남편인 소년 삐, 그리고 리나의 종횡무진으로 엮어진 소설, <리나>는 22명의 탈주자가 국경을 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인 무덤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구획을 나누는 것이 바로 국경이다. 국경의 기원은 울타리고 최초의 울타리는 남자들이 세웠다. 내 것, 내 여자, 내 자식, 내 마을, 내 나라 이런 식으로 울타리는 늘어나고 장벽은 높아졌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 모두는 수천 년을 갇혀 살았다. 물리적인 것에 그치면 좋았지만, 그보다는 우리들의 국경은 이제 삶의 모든 부분에서 넘나들 수 없는 내면의 실존들 사이의 분쟁지역이 되어버렸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갈등, 혹은 나와 세계 그 자체 사이의 갈등은 모든 삶의 영토주권을 불안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리나는 이러한 국경을 넘나들며 삶의 쓸쓸함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관계와 그 경계의 견고함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다른 무엇도 아닌 ‘몸’으로 보여준다. 화공약품 공장에서 겁탈을 당할 때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소금밭을 지날 때도, 시링의 창녀촌에서 공무원들과 맞설 때도 리나는 그 모든 부조리를 향해 눈물을 보이며 결코 뒤돌아서지 않는다. 리나는 국경을 탈출해 한 번도 자유의 몸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는 않는다. 결정은 자신이 내리고 현실도 자신이 받아들이고 심지어 현실을 개척하기까지 한다. 필경 삶의 진지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그 막막함 순간에도 리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젠 우리 죄다 공장에나 다니겠군.”(187면)

   비극의 기원은 없다. 어쩌면 현대사회의 부조리함은 너무 큰 것 너무 진지한 것에 가치를 둔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리나>와 <귀향>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성찰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엄마의 방귀 냄새처럼 기억 속의 향기를 그리워할 뿐이며, 보고 싶은 사람이 보고 싶을 뿐이라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한 가지 더. <귀향>과 <리나>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안토니아스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성에 의한 여성의 가계(家系)는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도전이다. 이 도전은 수십 년 동안 계속 시도되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것을 상투적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씨의 계보학, 그 생명력은 질기고도 질기다. <리나>가 그리고 있는 유사가족 관계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안토니아스 라인이다. 이 지점에서 <리나>는 최강이다. 넝마에 주워담은 계보, 필연적인 핏줄의 계보가 아니라 사건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우연의 계보, 그 계보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아버지가 부재한, 파편화된 후기 자본주의풍의 가족관계에 대한 서늘한 조롱이다. 이렇게 말이다. "아이고 아저씨 나 좀 살려 주세요."(2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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