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눈사람
조영훈 지음 / 마음향기(책소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볼까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 볼까나 - 서정주 시‘석남꽃’中에서』


우리 인간에게 생(生)과 사(死)는 어떤 의미일까. 살고 싶다 한들, 한평생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죽고 싶다 한들,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삶의 자리가 가시방석일지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비여, 쏟아져라. 천둥이여, 울어라. 때려라. 갈기갈기 찢어라. 부숴라. 부숴버려라. 사라지고 싶다. 지금. 당장. 세상에 뭐 이따위 일이 다 있는가. 사기다, 모두. 생과 사 모두』


인생의 절반도 살아보지 못한 서른하나, 동갑내기 부부인 선우와 유희. 이들 부부에게 어느 날 충격적인 운명이 닥치게 된다.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가혹한 병. 단순한 소화불량이라 생각하고 응한 건강검진에서 위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는 선우.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내가 가고 난 후 남겨질 가족과 자식에 대한 愛情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안타깝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일 것이다.


선뜻 자신의 병을 말하지 못한 채 고향 단짝 친구인 정화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되지만 눈시울을 붉히며 너희 둘을 친구로 둔 내가 죄인이라며 오히려 한탄조로 이야기 한다. 다섯 살의 예쁜 우리 딸 꽃별이는 또 어찌하는가? 부모를 한순간 잃게 될 아이에게 우리는 무슨 죄를 짓는 것인가. 사랑하는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심정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더 가혹한 것은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투병일지를 통해 시한부의 삶을 선고 받은 이들의 심리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재작년 방영된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암 선고를 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가족들에게는 혹여 상처가 될까 내색하지 않는 맹순이의 모성애 연기는 정말이지 같은 여자로써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남편의 거친 폭력 속에 힘든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차마 내가 당신이 버리고 간 딸임을 밝히지 못한다. 이처럼 유희에게도 쉽게 발설할 수 없었던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이모고, 이모가 엄마라니. 아버지가 이모부고 이모부가 아버지라니.”도저히 믿기지 않는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는 유희. 사랑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와 희생양이 된 생모. 그리고 이 두 사람으로 인해 삶의 피해자가 된 어머니.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을 유희는 세세하게 털어 놓는다. 한편, 살아생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과 회한과 함께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편히 쉴 안식처 없이 쫓기는 삶을 사는 엄마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정말 이와 같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있지,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닌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행복이었다는 걸 요즘 새록새록 느껴. 이게 바로 행복인데. 내가 의지하고 내가 사랑할 대상이 곁에 있다는 거. 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아침이면 같이 깨어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떠들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고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나란히 같이 잠들 수 있다는 거... ”』p 135


유희와 선우, 정화 이 세 사람의 만남과 결별의 과정에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추억이 깃들어 있다. 죽음의 순간을 함께 준비하고 맞는 이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어제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말도 있듯이, 삶의 순간을 즐기며 내 주변 이들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사랑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죽음을 함께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햇볕이 내리쬐어도 녹지 않는 초록 눈사람이 되어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죽음이란 사랑의 종결을 의미한다. 죽음만이 갈라놓는 있는 사랑. 갈라놓을 수 있는 사랑.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다. 함께, 같이 죽을테니.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죽는 것을 情死라고 하는데 그렇게 인위적인 정사가 아닌 돌발사, 자연사, 병사로. 그렇게 함께 영원한 사랑을 완성하게 될테니.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을 영원으로 완치하는 사랑. 대체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가.』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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