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읽는 러시아 역사
마크 갈레오티 지음, 이상원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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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그 러시아의 역사를 232페이지에 압축해놓았다는 책 소개를 보고 든 첫 인상은 반신반의였습니다.


"이게 가능해? 수박 겉핥기식 수준에 머물지 않을까?"


유럽인듯 유럽아닌 유럽같은 나라 러시아.

정교회의 국가로서 동로마 비잔틴을 계승하여 요즘 인터넷 밈인 '로마 후계자'였던 러시아.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한때는 북미까지 걸쳤던 세계에서 제일 큰 영토를 지닌 러시아.

20세기 두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공산주의의 중심국 위치를 차지한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

미국, EU, 중국, 인도 등와 함께 다극체제의 여러 중심 중 하나로 지목되는 푸틴의 러시아.


이런 어마어마한 나라의 역사를 단 232페이지로 요약하다니...

솔직히 말해서, 제가 서평이벤트에 참여한 건 요약을 제대로 했나 궁금했던 게 컸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책을 읽고 감탄으로 바뀌었습니다.

232페이지로 러시아 역사의 핵심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구나!


저자는 러시아 역사를 하나의 테마를 통해 분석합니다. 이는 부제에도 암시되는데요.

'매력적면서[표지에 오타를 내다니;;] 괴이한, 영광스러우면서 결사적인, 극단적으로 잔혹하면서도 영웅적인 한 나라의 이야기'

저자는 러시아가 방대한 영토에서 벌어진 복잡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왕조, 문화, 민족, 종교, 이데올로기 등을 하나로 융합하였기에, 굉장히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복합성은 혼돈이 되기 쉬운데, 러시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지난' 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왜곡에 가까운 창의적 역사해석, 전혀 성격이 다른데 나란히 놓여있는 역사적 위인동상들은 그 창조의 증거이고요.


저자는 이렇게 창조되야만 했던 긴 역사를 8개의 핵심적 인물들과 시기 - 키예프 루시, 몽골통치기, 이반 4세, 표토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19세기, 소련, 소련 해체 후 러시아 - 를 간략하면서도 재미있는 글빨로 요약합니다. 

232페이지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서인지, 위트있는 표현과 적극적인 역사비평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부연설명을 빙자한 괄호 안 문구들의 촌철살인이 정곡을 찌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러시아의 정치 특성을 몽골 탓으로 돌리는 것은 편리한 핑계에 불과하다.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는 몽골이 알리바이를 제공한 셈이다. 과거와 현재의 이방인 비평자들도 몽골 통치를 근거로 러시아를 타자화한다. 동유럽이 아닌 서아시아로, 기껏해야 잡종 악당으로 보는 것이다." - 66p.


"1625년 모스크바와 전 루시의 총주교가 된 니콘Nikon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마지못해 맡은 직분이기는 했지만 일단 총주교 위치에 오른 그는 달변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교회 정화에 나섰다. 그리스 비잔틴 원형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교회를 바로잡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의식과 예배가 새로 도입되었다.(목숨이 아깝다면 그리스보다는 당시 러시아가 옛 비잔틴 전통에 더 가깝다는 역설을 언급해서는 안 됐다.) 새로운 양식의 이콘 성화는 금지되었다. 니콘 추종자들은 모스크바 전역의 교회와 가정집에 들어가 이콘 성화를 압수해 불태웠다. 그 이콘을 그린 화가들은 눈알이 뽑힌 채 사방으로 끌려 다니며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성자와 종교적 장면을 그린 이 화풍의 발전은 실상 근대 초기 러시아 예술 문화의 핵심이었는데도 말이다.)" - 102~103p.


예카테리나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실은 정반대이다. 당시는 괄목할 만한 진보와 변화의 시대였다. 과거 금지되거나 무시되던 외국 서적이 번역되었고, 많은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연두 예방접종이 도입되었다. 여제는 종교 면에서도 관용을 보였으며 (그 와중에 교회가 소유한 마지막 땅이 몰수되기는 했다) 고문도 폐지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중략] 하지만 개혁의 핵심부는 비어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자유와 법률의 중요성을 진심으로 믿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와 군주가 법의 통제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여제는 저항이나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 완고한 전제군주였다. - 132~133p.


1917년에 권력을 잡은 인물은 '실용주의자 레닌'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성숙한 거대한 노동계급을 갖추지 못했고, 아직 사회주의를 건설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준비 안 된 나라에 사회주의를 억지로 도입했다가는 보수적인 성향에 혁명 에너지만 넘치는 정권을 낳는 역효과가 나타난다고 경고했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경고가 옳다는 것은 스탈린이 증명했다.) - 182p.


이렇게 단어, 문장, 문단 하나하나를 계산해서 쓴 듯한 기적의 필력은 232페이지라는 분량을 말도 안 되게 알차고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 능력만으로 호평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매우 간략하게 묘사된 거야 분량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분량 생각하면 매우 요약 잘 된 편입니다),

책을 하나의 테마에 녹아들게 재미있고 알차게 묘사하려다보니, 분량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비평이 많습니다.

자칫 초심자에게 특정 관점을 팩트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었어요.


전체적으로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진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물론 러시아의 전제성과 낙후성, 학살과 역사 왜곡을 좋게 보긴 어렵겠지만,

위트의 자극성을 좀 줄이고, 보다 애정있는 묘사를 했으면 더 알차지 않았을까 아쉬움은 듭니다.


위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긴 역사를 232페이지 안에 글빨 갖춰 재미있고 알차게 요약하는건 아무나 따라 못 합니다.

러시아사에 관심있는 사람한테 추천하고 싶습니다.

내용이 아쉽다 싶으면 저자들도 챕터 말미마다 책들을 추천한만큼 찾아서 읽으면 되고요.

(아쉽게도 언어장벽으로 인해 한국어 책들은 찾기 힘들겠지만)


개인적으로 5점 만점에 4점 ★★★★ 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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