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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과의 정의가 뭘까. 그 궁금증이 책을 집어 올리게 만들었다. 대충 한자어로 생각해보면 과실이 부서지다정도의 뜻이려나. 지레 짐작하고 읽어 내려가니 책의 끄트머리에서 작가는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이야기는 은퇴 직전의 방역업자인 조각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방역업자란 소위 음지에 존재하는 살인청부업자를 나름의 은어로 표현한 것이다. 늙어버렸지만 지켜야할 것이 생긴 조각과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조각이 연정을 품었던 ’, 뒤틀림과 냉소로 무장한 젊은 방역업자 투우’, ‘조각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강 박사네 가족 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방역업자로서의 삶이 서서히 어떤 연민과 회환으로 번져가는 과정은 잔혹하지만 먹먹하게 드러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작가는 언젠가 냉장고 속에 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과일을 보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눈부시고 달콤했으면서, 어느새 생명을 다한 것처럼 부서져 흐르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다름없어 보인다. 과일인지 쓰레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은 하루빨리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을 사람에게 대입할 수도 있게 된 요즈음이라 더욱 그렇다. 형태가 변해도 속성은 변치 않는데, 그 상실감과 허무함이란 참 간사한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파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과실이 부서지다는 뜻의 破果‘16세의 나이라는 뜻의 破瓜. ‘파과에는 생기 넘치는 젊은 시절의 삶부터 볼품없고 주름 가득한 노년 시절의 삶이 모두 담겨있다. 사람의 일생을 나타내기에 이렇게 적합한 단어가 또 있을까. 틀린 답일테지만 나는 작가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波姱(물결 파, 아름다울 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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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기일회라는 말 알아? 그것이 우연의 스쳐 지나감이 될지, 아니면 운명의 만남이 될지, 모든 것은 자신이 하기에 달렸어. 나와 그녀가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일은 운명의 만남이 되지 못한 채 허망하게 날아갔어. (중략) 그 기회를 잡을 재주도 배짱도 없었기 때문이야!"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존한다.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한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를 경험할 때가 있다. 가령 새로 산 옷을 입고 산뜻하게 외출했는데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쳤을 때, 여행지에서 몇번이고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처럼. 이 책은 바로 그 '우연'을 가장한 인과의 끈으로 이어진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책과 처음 마주할 때 가장 먼저 표지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나는 번역서보다 원서를 먼저 접했는데, 짧은 흑발의 여자와 사과 모양 배경, 3층 전차, 마네키네코, 코끼리 엉덩이, 텐구,  힘들게 매달려 있는 불쌍한 남자 등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 대체 무슨 내용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다시 보니, 개인적으로 번역서의 표지에 한표를 주고 싶다. 순진무구 호기심천국인 아가씨와 그 뒤를 따라다니며 항상 우연을 가장하는 소심한 대학생. 내가 생각한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책은 독특하다 못해 괴상(?)한 점들이 넘쳐난다. 남자와 여자가 주고 받듯 서로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판타지적 요소들이 다분하다. 계절별로 이어지는 엉뚱하지만 유쾌한 사건사고들 속에서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아주 미미하게, 우연 처럼 가까워지지는데 사실 필연일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읽다 보면 어느 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저자 '모리미 토미히코'는 거의 모든 소설을 '교토'를 무대로 쓴 덕에 '교토 작가'라고 불린다. 물론 이 책에서도 교토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고급 요정과 이자카야가 즐비한 본토초 거리, 북쪽에 위치한 영엄한 시모가모 신사, 교토의 모든 젊은이들이 밀집하는 시조가와라마치 거리 등 생생한 배경 묘사는 내가 마치 그곳에 서 있는 느낌을 받게끔 한다.

 

독특한 세계관과 아기자기한 배경, 풋풋하고 설레는 두 사람의 거리, 한장 한장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스쳐가는 장면들…이런 잔상들은 이 소설만이 지닌 재미의 매력 아닐까. 낯선 문체에 당황하지만 이내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봄 기운 만연한 좌충우돌 망상폭주 교토 로맨스! 사랑에 빠졌다면,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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