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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ㅣ 북멘토 가치동화 5
박상률 지음, 이욱재 그림, 5.18 기념재단 기획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1980년의 봄,
그때 나는 갓 전남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아침 나절이면, 입학 기념으로 마련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종종거렸다. 진흙이 구두 밑창에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대학 캠퍼스의 공기는 한없이 자유로웠다. 나는 몇 권의 교양 도서를 품에 안고 인문대 건물을 향해 종종거리곤 했다. 그때마다 운동장 쪽으로부터 통통 소리를 내며 퉁겨오르던 정구공 소리가 맑고 싱그러웠다. 가슴 설레는 대...학 생활이 마악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즈음 학내의 봄은 바야흐로 유신독재의 학군단 체제를 청산하고, 새롭게 부활된 직선제 총학생회장 선거로 점차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유독 짙은 황사가 철쭉꽃 이파리 사이로 짙게 내려앉던 그해 봄은,
고교 시절까지 그저 모범생으로 무난하게 살아왔던 내게는 방황과 갈등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거세당하고, 유신시대의 교육과 이념에 잘 길들여진 어린 짐승에 불과했던 나는, 점차 최루탄 가스가 난무하고 함성과 구호와 돌멩이들이 날아다니는 현장에서 도망쳐 나오기에 바빴다. 발을 접지른 채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한 손에 구두를 들고 두려움에 떨며 절뚝절뚝 현장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는 사이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교 정문은 폐쇄됐다. 자취방에 숨어들어 떨고 있는 나를 찾아낸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대학생들을 찾아내 씨를 말려버린다는 풍문이 시골 구석에까지 전해들었다. 두려움에 질린 어머니는 나를 친척집으로 데려가 다락에 숨겨놓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캠퍼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죽음의 침묵만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동아리 회원 중의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잡혀가고 없었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 수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학점은 바닥을 쳤다. 나는 입학 때 사두었던 구두와 치마를 그뒤 다시는 입지 못했다. 내 몸과 의식이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빚으로 남았다. 잿빛이나 검은 색 이외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하는 죄많은 청춘이 그렇게 흘러갔다..
* 5.18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동화책 「자전거」가 나왔다. 5.18기념재단 기획으로 북멘토에서 출간한 이번 동화는 그동안 '청소년문학의 개척자'라고 일컬어지는 박상률선생님의 역작이다.
사람들은 '5월 광주'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피로감부터 호소한다. 또 광주야? 제발 그만 우려먹으라며 조소하고 비난한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광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려고 노력했는가? 저 멀리 세계 곳곳의 해외여행은 다니면서도, 당신의 성능 좋은 자동차로 기껏 몇 시간 걸리지도 않는 이곳을 당신은 한번이라도 찾은 적이 있는가. 어이없이 죽은 자식과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의 절규와 눈물로 가득찬 묘비를 읽어보았는가. 가슴을 쥐어뜯는 낭자한 그들의 울음소리에 귀기울여 보았는가.
동화 「자전거」는 행복하게 살아가던 어린 소녀 꽃님이의 가정에 불어닥친 역사의 격랑을 차분하게 서술한다. 어린 꽃같이 아름다운 영혼이 영문 모른 채 죽어야 하는 절정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결코 비껴갈 수 없는, 현대사의 비극인 5.18을 어린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동화「자전거」는 기실 '어른을 위한 동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