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맛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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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번번이 실패하는 그저 보통의 존재.
-<보통 맛> 민음사 刊 / 최유안

* 3년 전 겨울.
깊은 밤, 그이의 전화를 받는다.
"선생님! 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고교 문예반을 30여 년 이끌다 보니 가끔 이런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 성취인 양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한없이 달뜨곤 한다.

그이의 당선은 글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진 채 오랫동안의 방황을 지켜보았기에 더욱 값지다. 경제연구소 연구원인 그이는 살인적인 업무 일정을 소화해내면서도 지치지 않고 썼다. 그렇게 쓴 작품을 봐달라고 내게 보내오기도 했다. 공모전에서 떨어졌다고 울면서 전화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온통 베개를 얼룩지게 했던 내 젊은 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침내 그이는 휴직계를 내고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길은 욕망이 가는 대로 난다. 인간은 그 사나운 욕망에 덜미를 잡힌 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게 마련이다. 내 경우도 그랬다. 몇 번이나 때려치우겠다고 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런 짐승을 어찌 내가 이길 수 있었겠는가.

* 그리고 오늘
최근 출간된 그이의 첫작품집을 읽는다. 이제 그이는 내 자장을 넘어 훌쩍 커버렸다는 것을 느낀다. 그이에게 무슨 말인가를 지껄였던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그이는 지금도 글이 안 풀릴 때이거나, 삶의 모퉁이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면 전화를 해 내게 조언을 구한다. 묻고, 듣고, 무구하게 맞장구를 친다. 선생의 성취를 제 일인 양 기뻐한다. 든든한 도반이자 선의의 경쟁을 품고 함께 갈 제자를 둔 선생의 든든함이자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이의 동아일보 중편 등단작은 <내가 만든 사례에 대하여>다. ‘국제 공조에 의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난민'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 난민 캠프에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극도의 불행에 처한 어린 남매를 만나 그들의 삶에 개입하다가 난민 캠프에서 퇴각하고 만다. 어설픈 동정과 논문 완성의 갈림길에서 한계를 느낀 탓이다. 5년 뒤 비극적으로 누나를 잃고 한국으로 흘러온 아술과의 재회로 중단된 논문을 완성하고 국제학회에서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치지만, 한국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다시 레스보스로 건너간 아술의 비극적인 죽음을 숨긴 채 성공적인 불멸의 사례자로 포장해낸다는 이야기.

<본게마인샤프트>도 마찬가지다.
독일 유학생으로 오래 살아온 작가의 경험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소설의 공간은 ‘공동주택’이다. 한국인인 ‘혜령’과 룸메이트인 중국인 ‘멍’, 독일인 '스테파니'와 '멜라니'가 모여사는 그곳에서 우리는 진정 타인의 이해와 공감에 도달할 수 있는가, 국경과 인종을 넘어 이해는 가능한 것인가를 낯선 시선으로 묻는다.

직장에서 이해심 넓고 너그러운 상사이자 동료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이 팀장과 팀원의 불륜 앞에 드러내는 적나라한 감정으로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보통 맛>,

대학 동창으로 정년 퇴임을 맞는 교수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다시 만난 세 명의 친구들, 살아가는 모양도 제각각인 그들에겐 유럽여행을 함께 했던 갈등과 서로 다른 기억을 현재적 삶에 대입하며 무시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모여 살아가는 삶을 이해하는 데 안간힘을 더하는 <심포니>.

가족의 행복을 위해 집을 짓고자 애를 쓰는 주인공에게 정작 집이 주체가 되고, 가족이 타자로 밀려나는 역설을 드러내는 <집 짓는 사람>도 여운이 길다.

우리는 보다 나은 인간이 되려고 사력을 다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 우리는 대단하지도 멋지지도 않는 그저 보통의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위로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전체 8편의 단편, 중편, 장편(掌篇)이 모인 이 책은 각각의 빛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작가의 색채를 일관되게 보여주는 수작들로 한 편도 빼기 어렵다.

그이의 옹골찬 결실 앞에 내 마음은 수확을 맞는 농부처럼 설렌다. 그이가 앞으로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일지 기대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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