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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1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끝도 없는 밑줄, 누구나 꿈꾸는 아메리카나!'
좀처럼 읽지 않는 아프리카 소설을 연달아 세 권이나 읽었다. 모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이었고, 어쩐지 읽기 힘들 것 같은 익숙하지 않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담은 소설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예를 들어 인종이라던가 페미니즘이라던가 잘못된 시선에 놓이기 쉬워서 꺼내기 힘든 소재들을 그녀의 시선으로 가치있게 담아낸 그녀만의 소설이 무척 좋았다.
1권, 2권으로 약 8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인 아메리카나를 읽는 동안에 그동안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길에서 마주치는 흑인들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했고 그들의 머리카락과 피부에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그들의 삶까지도!
P. 295
그녀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야 부끄러움이 솟아올라 얼룩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고맙다고 한 것, '발음이 미국인 같다'는 말을 열심히 화환으로 만들어 자기 목에 건 것이 수치스러웠다. 미국인처럼 말한다는 게 어째서 찬사받을 만한 업적이란 말인가?
소설의 주인공은 이페멜루, 매력적인 흑인 여성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오빈제 역시 흑인 남성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했고 한 명은 미국으로 한 명은 영국으로 가게 되면서 서로가 없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떠나왔던 나이지리아에서 다시 재회한다. 이렇게 말하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연애소설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보다는 이페멜루가 그리고 오빈제가 나이지리아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느껴야 했던 모멸감과 수치심이 더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이지리아로 가야 했던, 매일매일 수치심을 견디며 살고 감내하며 버티면서도 아메리카나를 꿈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P. 316
열정적인 고객 서비스와 빛나는 거짓으로 만들어진 가면은 그녀가 개발한 미국식 자아의 일부였다. 그녀는 그것을 수용하고 흡수했다.그 손님이 가고 나면 그녀는 어깻짓 한 번으로 미국식 자아를 털어 버리고 할리마와 아이샤에게 미국인들이 얼마나 버릇없고 유치하고 거득먹거리는지에 대해 불평하겠지만 다음 손님이 들어오면 또다시 완결무결한 미국식 자아로 변신할 것이다.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 이 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흑인인 그들의 삶을 담은 소설이니 말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과거 노예였던 그들의 삶도 지금은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언젠가 티비에서 봤던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난다. 자신들을 "검둥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티비 속 그들은 웃었다. 우리가 웃는 것처럼, 그들도 웃었다.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슬펐다. "어떻게 그런 단어를 만들어서 부르죠?" 그 후에 말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자신들 역시 슬프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분명 슬픈 것만으로 부족한 삶을 살았을 것 같아 나 역시 슬펐다. 슬픔을 넘어선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살아야 했을 테니 말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머리카락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애초에 없어야 할 차별을 당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이페멜루는 흑인이기에 겪었던 것들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흑인'을 주제로 한 글을 통해 미국에서 돈을 벌 수 있었고 강연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글에 열광했던 건 누구였을까? 미국에서의 아메리카나를 꿈꾸는 흑인들이었을까? 아메리카로 살면서 우월적인 인종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