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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 혼자여서 즐거운 밤의 밑줄사용법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꽤 오래전에 구입했던 에세이였는데, 한참을 그냥 그 자리에 두었던 에세이였다. '읽어야지, 언젠가는 읽어야지!'하면서 말이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워낙 강해서 한동안 손이 가지 않았던 에세이를 근래 다시 읽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금방 다 읽어버렸다. 심지어 공감 가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접어 놓은 페이지 역시 많았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랬을까? 문득 그리 길지 않았던 기간에 '나'라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변한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책을 읽는 것도, 나에게 맞는 적당한 시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던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P. 64
요즘의 저는 '나'로 시작하는 말이 아니라 '너'로 시작하는 말에 관심이 갑니다. '내가 말이야'보다는 '너는 말이지'로 시작하는 말에 좀 더 귀 기울이게 돼요.
이전의 저는 뭐든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을 했어요. '내'목표, '내'작품, '내'의도와 '내'입장 같은 것들만 떠올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는 말을 하느라,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당신의 말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았죠.
혼자여서 즐거운 밤의 밑줄 사용법
실제로 저자가 읽었던 책들의 밑줄을 그어둔 구절들을 인용하며 저자의 생각과 감정이 더해진 에세이였는데, 나 역시 그런 저자의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지하철에서 읽을 때는 밑줄 대신 페이지를 접어두기도 했다. 서평을 남기려고 접어둔 페이지를 넘겨 보며 몇 번을 곱씹어서 읽었던 글도 있었고 대체 여기에는 왜 밑줄을 그었을까 하는 구절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글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럴 때 위로가 된다. 굳이 누군가 대상이 있지 않아도 책 한 권에 담긴, 밑줄을 그은 문장들이 위로가 되어주는!
P. 95
우리 말에 '속상하다'라는 절묘한 표현이 있죠. 내 몸속이 '상한다'라는 뜻인데 괴롭고 슬픈데도 눈물을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면 몸속의 울음이 우물처럼 고여 썩을 수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렇게 보면, 속이 쓰릴 때 나오는 위산이나 스트레스 호르몬이라는 코르티솔도 어쩌면 눈물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누군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면, 흐르는 눈물은 그 사람이 나를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게 진짜 용기니까요. 가끔은 흘러넘쳐도 좋아요.
요즘, 다시 배우는 생활이 시작되면서 회사에 다닐 때보다 다른 사람들과 더 의논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릴 때는 참 그게 힘들었다. '혼자 하면 더 편할 텐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라며 하고 싶지 않은 조별 과제에 속이 썩었던 시절과 달리 지금도 여전히 힘들지만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또 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생각은 항상 같으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면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어린 시절의 나는 그저 '다름을 틀림'이라고 받아들이며 혼자 스트레스를 받았구나,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혼자서 나를 칭찬하기도 했다.
P. 112
갈등에는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건,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라는 걸 인정할 때, 나의 다름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시기가 딱 퇴사를 했던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퇴사를 한 이후에 책을 읽을 시간도 더 많아지고 좋아하는 여행도 실컷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오롯이 여행을 떠났을 때만 그런 여유를 가졌고 일상에서는 매일이 불안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여행만 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막상 퇴사를 해보니 그저 마음의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퇴사를 하며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앞으로 나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또롯하게 보였다. 그 방향을 향해 직진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때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으며 어느 순간 이름 아침에 눈을 떠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목적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목적지'를 떠올리며 하고 싶은 일이면서 잘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1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결코 퇴사했던 그 시간이 불안했다고만 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내게는 인생 중 가장 값진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에세이를 읽으며 문장 수집가가 되고 싶었다. 그저 밑줄만 긋는 게 아닌 필사를 하고, 코멘트를 달며 내 마음에 꼭 들어오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수집하는 그런, 이 책 안에도 그런 문장들이 무척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