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라미 현 지음 / 마음의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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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쳐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고 운이 좋으면 명예와 부를 누리기도 하지만, 사후에 그 업적을 평가받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정말 많다. 나는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존경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


유퀴즈를 보면서 저게 가능한가? 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어느 사진작가의 참전용사 기록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고 있으며 당신이 찍은 사진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길 바란다고 한다. 기록이 곧 역사가 되고, 다음 세대의 자부심이 된다는 믿음으로. 먼 나라 한국전쟁에 참전해 준 사람들도,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도 그저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책 제목의 유래를 방송에서 직접 들었기에 괜히 뭉클하다. 사진값을 지불하겠다는 참전 용사에게 사진작가가 감사 인사와 함께 건넸던 말이라고 들었다. 당신은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다고. 감사하다고.
그 말을 듣고 내가 다 울컥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은 그 어떤 말보다 근사한 보상이 아닐까.


얼마 전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자세히 분석할 일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책인데, 실재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고통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살기 위해 그것을 토해내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졌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에 발발했지만, 그것이 국가폭력에 기인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받기까지 무려 7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피해자는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고통받았을 것이고, 슬프게도 생존 피해자는 그 수도 현저히 적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의문이 들었던, 무지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도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 50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잊힌 전쟁에 참여했던 잊힌 용사들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몇 년 전, 어느 비디오그래퍼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DVD로 제작해서 500달러를 받고 판매했다고 한다. 충격적이게도 실제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및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이런 식으로 사기를 당하는 일이 꽤 있다고 한다.
엉뚱한 소리지만, 사기죄는 처벌이 왜 그렇게 가벼운지 모르겠다. 피해자는 인생을 송두리째 훼손당하기도 하고, 그 충격이 평생 올가미처럼 괴롭힐 텐데 고작 몇 년의 수감 생활로 그 피해와 고통을 보상할 수 있을까. 하물며 참전용사들에게 사기를 친 것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우리가 국군 참전용사로서 나라를 지켰지만, 그 대우를 못 받았다고 생각해 서럽고 한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근데 이렇게 사진으로 찍힌 내 모습을 보니까 되었어! 난 우리나라 지켰으니까 된 거지. 앞으로는 너희가 잘하면 돼. 애 역할은 거기까지였던 거야. 고맙네! 자네 덕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한이 풀린 것 같아. 고마워. (p. 205)

슈퍼에서 귤을 훔치다 적발된 국군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난다.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 사는 국군 참전용사들의 힘든 현실을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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