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뜰
강맑실 지음 / 사계절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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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의 머리말에 적힌 유년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단번에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유년기를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떤 기억부터 열어봐야 할까 망설여졌던 것이다. 이내 방과 후 운동장, 퀴퀴한 냄새가 나는 학원 버스 안, 오락실과 분식집 사이 좁은 골목길처럼 익숙했던 공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유년의 조각들을 하나씩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막내의 뜰작가도 어떤 공간에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크게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옮겨 다녔던 일곱 개의 집으로 나뉘어 있고, 그 속에서 집집마다 달랐던 부엌의 모습, 화장실의 위치, 뜰 한편의 쪽문 등으로 시선을 옮겨 다닌다. 내 기억 속에도 유년기에 살았던 집은 생생하게 남아 있지만 사실 그건 책 속 화자인 막내의 기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일 것이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어도 나 같은 2030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빌라나 아파트 생활이 익숙세대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많은 기억들이 큰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런 세대에게 60년대라는 이 책의 배경은 그저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툇마루와 장독대, 적산가옥이나 다락방 등이 전부 생소한 모습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내 손을 붙잡고 성큼 뜰 안으로 발을 내딛게 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막내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데리고 다니며 신이 나서 식구들이나 집 안 구석구석을 소개해주는 모습은 마치 친척 동생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어린아이 특유의 생각과 목소리가 담긴 그 모습에 종종 나의 어린 시절이 겹쳐지면 흠칫 놀라기도 했다. 시대가 다른 만큼 그 안의 이야기가 조금 낯설기는 해도 유년기에 느끼는 감정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엄마가 아프던 날의 불안함, 늦은 밤 화장실 갈 때의 두려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과 교생 선생님이 좋았던 감정들……. ‘유년이라는 연결 고리 앞에서 몇 십 년을 뛰어넘는 세대 차이도 쉽게 무너졌고, 어느새 옛날이야기가 아닌 귀여운 막내의 이야기에 푹 빠져든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막내의 이야기는 뜰 안에서 잔잔하고 소소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어린 막내의 해맑은 모습뿐 아니라, 식구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다.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애틋한 형제자매의 이야기, 막내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밤비와 복실이, 유행가를 부르던 향금이 언니와 자식을 위해 이 집 저 집을 오가시던 부모님까지.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일까,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며 살았던 날들이 한 장씩 포개어질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비로소 내 어린 시절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건 아마 유년기가 지났기에 알게 된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를 모두 지나온 작가가 막내의 눈을 빌려 보여주는 풍경은 연령과 관계없이 독자에게도 전해져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게 한다.

이사를 갈 때마다 달라졌던 집의 평면도와 막내가 묘사하는 풍경이 궁금할 때쯤 등장하는 그림들은 막내 이야기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특히나 구조도 양식도 전부 다 다른 집의 평면도는 마치 집 스스로가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일화를 쏟아내는 느낌이다. 광주의 금남로, 장동, 태봉산 등은 아직도 있겠지만 막내가 추억하는 흙길과 기와집은 더 이상 없다. 큰오빠가 속상해 했던 것처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구석구석 깔렸고, 높은 빌딩이 들어섰으며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누군가의 유년은 자라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선, 가장 오랜 시간 내가 머물렀던 집의 평면도를 그려보았다. 네모반듯한 아파트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집에도 장독들을 보관하는 베란다가 있었고, 막내의 우물처럼 혼자 있고 싶을 때 들어가는 벽장과, 언니가 즐겨 치던 피아노가 있었다. 그 모습은 조금 달라도 모두의 유년은 저마다 조금씩 닮아 있지 않을까? 똑같이 흘러가는 날들 속에서 만난 막내의 뜰은 아주 잠시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유년은 그 자체만으로 삶의 어떤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삶을 낙천적이고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온 것 같다는 작가의 말이 어쩐지 큰 위로가 된다. 오늘은 아주 잠시, 막내의 손을 잡고 내 뜰 안을 거닐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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