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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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존재의 슬픔


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오인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신에 생명을 불어넣은 과학자의 이름이며,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인 ‘괴물’에겐 이름조차 없다. 우리가 이름을 혼동하고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북극 항해에 나선 탐험가 월턴이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만난 이야기가 나오고, 그가 어떤 광기와 열의에 휩싸여 피조물을 창조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괴물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소설에서 괴물의 서사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바로 괴물의 서사가 이 소설의 풍부한 해석을 가능케함과 동시에 이후 문학과 다양한 장르에서 상상력과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을 부를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리뷰를 쓰는 이 순간에도 곤란함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 이름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한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지요.”
- 『프랑켄슈타인: 현대판 프로메테우스』(현대지성) 중에서


괴물은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생명을 얻자마자 버림받는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신을 조합하여 인간을 만들었으나, 시신이 살아나자 공포에 질려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도망쳐버리고 만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거대한 몸집과 흉측한 외모 때문에 모든 곳에서 야수로 취급받는다. 그가 베푼 선행조차 폭력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에겐 누군가 다정스럽게 불러줄 고유한 이름도, 안전하게 머물 장소도 없다. 곤경에 처했을 때 그의 신원을 보장해 줄 가족이나 친구, 그 무엇도 없었다. 어느 곳에서도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속감을 얻지 못한다. 아직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의 예절을 배우지 못한 그에겐 그를 사회로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겉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그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자신을 혐오하고 배척하기만 했다. 불행에 빠진 그는 몸을 숨길 곳을 찾게 되고 펠릭스의 헛간에 숨어지내며 그들 가족의 삶을 몰래 지켜보게 된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을 느끼고 인간에 관해 많은 사실들을 깨쳐나간다. 인간이 지닌 훌륭한 덕성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고 여기에 희망을 건다. 펠릭스의 가족이라면 자신의 흉측한 외모 너머로 자신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보아주리라는,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줄 거라는 열망을 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첫 단추로써 그들의 환대는 너무나 절박하고 필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마저 그를 외면하고 떠나버렸을 때 그의 희망은 처참히 짓밟힌다. 자신을 창조하고 이러한 비참과 절망 속에 내버려 둔 창조자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다.


처음에 괴물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 흉악하고 포악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하고 의지할 곳 없으며 잘 알지 못하여 상처받는 어린아이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폭력에도 그는 자신 안의 선한 의지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먹고 점차 사악하게 변해간다. 어느 한 사람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에겐 부모와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그를 증오하고 그를 버렸다는 사실이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다. 표피 너머로 내면의 진실을 보는 감각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현혹되어 온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불완전한 감각은 상대를 단순하게 축소해버리고 쉽게 판단해버리며 재고의 여지없이 돌아서게 만든다. 사람들과 다른 외모를 지닌 괴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만다.


다양한 혐오 담론과 관련하여 피해자들에겐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편을 가른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폭력의 옷을 입은 방식으로 발화할 때에야 비로소 관심과 주목을 받는 존재들이 있다. 평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주변부로 밀려나기 쉽고 대개 가시화되지 못한다. 어떤 일부 특성 때문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 바로 혐오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가 약자를 폭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괴물이 되어간다. 그 어디에서도 온전한 자기만의 자리를 구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숨기도록 강요당하며, 사람들의 눈에 띈다는 사실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될 때, 그는 분노에 의탁하게 된다. 자신과 똑같이 닮은 반려자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그의 마지막 의지이자, 최소한의 우정과 유대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에 대한 요구이며 관계를 향한 인간의 절실한 욕구다. 그 누구도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더라면, 그가 프랑켄슈타인의 친구와 가족들을 죽이는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늘 있어요. 선택을 하면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고요.”
-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중에서


피조물을 만들고 이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생체 전기 실험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실험 자체에 광분할 뿐 결과의 위험성을 전혀 내다보지 못했다. 메리 셸리의 삶을 다룬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에서는 퍼시 셸리와의 만남과 이 소설을 집필하던 당시의 메리의 고뇌가 그려진다. 영화는 제한되고 차별당하는 여성의 삶과 그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불행에 맞서는 메리의 의지에 초점을 둔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퍼시 셸리와의 동거를 선택한 그녀는 자신과 그들의 아이에게 책임감을 갖지 않고 여전히 사랑할 자유만을 추구하는 셸리의 태도에 상처받는다. 그녀의 소설은 작가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작품 자체로써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며, 시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남편이 쓴 소설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프랑켄슈타인』은 처음 출간 당시 저자의 이름을 지운 채 익명으로 출간되었고, 이는 소설 속 괴물에게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결과에 대해 숙고함이 없는 무책임한 과학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프랑켄슈타인은 현실 속 셸리와 겹쳐진다. 메리의 이복동생을 임신시키고도 그 모두를 무시하고 외면해버린 바이런(양육비는 보냈을지라도)은 좀 더 극악한 버전의 셸리이며, 수많은 방탕한 인간의 모습이자,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폭주하는 과학의 미래와 포개진다. 괴물은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현실의 여성이며, 배척당하고 보이지 않기를 강요당하는 약자이자, 상처 입고 파헤쳐 지는 지구이다.


잠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동생의 실연을 직시하고 바이런의 별장을 떠나려는 메리에게 바이런 경은 말한다. “난 사랑한 적 없어요. 그런 척한 적도 없죠.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고 여자는 여자죠. 젊은 여자가 집요하게 성인 남자에게 덤비는데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메리는 단지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방법은 늘 있어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면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고요.” 바이런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바이런적 영웅은 이후 많은 문학에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그는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고립감과 무시, 불행은 우리를 악마로 몰아간다. 유부남과의 낭만적 사랑의 도피로 시작된 셸리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셸리를 떠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메리는 셸리가 실종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8년 여 간 그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네 아이를 낳았으나 세 아이를 잃었다. 젊은 날 자신의 선택이 무모했을지라도 그녀는 그 선택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힘든 순간들을 견뎌낼 힘은 자신의 선택을 수용하고 선택한 삶과 불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오기도 하니까.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에 다가가보고 싶은 것이다. 퍼시 셸리 사후 그녀는 독신을 유지했으며, 아들과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버림받고 상처 입었지만,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은,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일을 막고 싶은 한 여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자 분투하는 의지로 쓰였다. 소설은 말한다. 우리에겐 언제나 다른 방법이 있다. 그리고 선택엔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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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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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소설의 시작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당연히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자,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마는 책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행복, 정열, 도취와 같은 말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을유문화사, 2021, p59



한 여인이 음독자살했다. 시골 의사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에마 보바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따분한 시골생활이 지겨웠던 그녀는 샤를 보바리와의 결혼이 삶의 돌파구가 되어줄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결혼은 그녀가 꿈꿔온 낭만적 사랑의 감정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실의와 권태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부부는 후작의 초대로 저택을 방문하고 귀족들의 화려한 삶을 엿보게 된다. 에마는 더욱더 ‘지금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있을 더 화려한 삶을 꿈꾸게 된다. 그러다 로돌프라는 남자의 계산된 유혹에 넘어가 선을 넘고 만다. 현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그녀는 로돌프가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 줄 것으로 믿었다. 그 약속을 실행하기로 한 날 밤, 그녀와 단지 즐기려 했을 뿐 아이 딸린 유부녀를 책임질 마음은 없었던 그에게 가차 없이 버림받는다. 상실감과 절망감에 병을 앓고 난 에마는 수년 전에 알고 지내던 레옹이라는 젊은이를 도시 루앙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도시 생활을 맛본 레옹은 더 이상 순진한 옛 청년이 아니었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뿌리치려 애쓰는 애마를 달리는 마차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녀의 행보는 점점 더 과감해지고 레옹과의 화려한 밀회를 위한 소비는 그녀를 빚더미에 앉게 만든다. 결국 빚 독촉이라는 현실에 내몰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다분히 통속적인 소설이다. 1857년 플로베르는 이 소설의 일부가 풍속을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기소당했는데, 얼마 뒤 무죄판결을 받게 되고 소송 덕분에 오히려 유명세를 얻게 된다. 작고 사소한 물건에서부터 풍경에 이르기까지 도가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세세하고 장황하게 묘사하는 이 작품에서 사실상 간음 장면이나 음란한 장면 묘사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 다른 사물이나 풍경으로 치환되어 환유적이고 암시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작가는 에마의 간통 사건에 대해서 옹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데,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플로베르는 이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작품이 현대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단순히 형식이나 문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마담 보바리>의 시대적인 배경과 인물들 간의 갈등을 살펴보면 인물들이 가지는 고뇌의 성격 또한 현대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대상의 사실적 반영



이 소설이 쓰이던 19세기에 이르면, 과학의 발달에 따른 합리적 세계관이 과거 종교적 세계관을 거의 대체하게 된다. 구시대 질서가 와해되고 자본주의적 질서가 새롭게 형성되어가며 귀족과 성직자 계층을 대신하여 부르주아 계층이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 약사 오메와 마을 신부의 대립은 이 같은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반영한다. 작가는 하나의 가치관에 매몰된 두 사람 모두를 어리석게 묘사하는데 신부는 어리석은 구시대의 표상으로, 오메는 똑똑하지만 자신의 이해관계와 실리에만 몰두하는 비열한 과학자이자 양심 없는 언론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오메와 더불어 자본주의적 인물로 나타나는 사채업자 뢰뢰는 끊임없이 호화스러운 물건을 보여주며 에마의 사치 욕구를 들쑤시고 어음을 돌려 막도록 부추김으로써 그가 그녀에게서 받을 빚을 눈더미처럼 불려놓는다. 그의 술책에 속아 넘어간 에마는 결국 법원을 통해 압류 통지를 받고 돈의 압박에 의해 파멸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녀는 사방팔방 돈을 구하러 다니지만 그녀를 탐했던 애인들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소설은 오메가 그토록 염원하던 훈장을 받고 뢰뢰가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자본주의가 부상하게 될 현실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종교적 가치관의 쇠퇴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던 신에의 귀속감이 사라지면서 인간은 삶의 좌표를 잃어버리는 위기에 처한다. 신을 위한 쓰임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면 인간의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삶은 공허해지고,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진정한 삶이란 인생을 대단히 의미 있는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은 이러한 배경 하에 싹텄으며, 이성을 맹신하는 계몽주의 풍토에 대한 반발로 감정과 주관, 상상력을 중시하는 경향을 띈다. <무의미한 날들을 위한 철학>(프랑크 마르텔라 저/황성원 역, 어크로스, 2021)에서 저자는 “낭만주의는 할리우드 영화와 숱한 팝송이 담고 있는 생각, 즉 사랑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이어야 한다는 생각의 진원지였다”고 말한다. 에마는 이러한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낭만적인 사랑에 기대는 방식으로 내면의 공허함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녀는 도시의 수도원에서 세련된 교육을 받았지만 저급한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은 까닭에 소설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크게 느끼고 자신의 현실보다 나은 삶을 꿈꾼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할 수 없게 만드는 낭만주의의 속성은 사랑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걸게 만들고, 존재하지 않는 삶을 열망하게 만들며, 격정적인 쾌락으로 흐르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현대인의 자화상



플로베르는 낭만주의가 시대를 풍미하던 시절에 유년을 보냈다. 그는 <마담 보바리> 집필 이전에 ‘낭만적’이고 서정성이 배어 있는 소설을 써서 비평가 친구에게 보였다가 매섭게 혹평을 받은 일이 있다. 이후 플로베르는 실제 있었던 의사 아내의 불륜 사건을 소설화 하면서, 자신 안에 내재된 낭만주의를 극복해 보이고자 했다.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은 문체를 고민하며 단어 하나하나 뉘앙스를 고려해 선택했고 시적 리듬을 살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끝에 시적인 문체와 플로베르만의 독창적인 구성방식을 완성했다. 묘사하는 것을 극도로 즐겼던 그는 모자나 신발에서부터 마차나 풍경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세부적이고 사실적이며 장황한 묘사로 때때로 지루함마저 안겨준다. 플로베르는 4년 반 동안이나 오로지 이 작품만을 고쳐 썼다고 한다. 번역된 문장을 통해서는 그 뉘앙스와 문체의 특성을 다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물들에 대한 지극한 묘사를 통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심 속에 문장을 가다듬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마차가 등장하는 영화 같은 장면 묘사와 공진회의 연설과 밀담이 교차하며 공명하는 심포니 같은 장면 구성은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지점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시와 희곡만이 진정한 문학으로 대우받던 시대에 소설을 당당히 문학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담 보바리>는 현대 소설의 시발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자는 적어도 자유롭다. 여러 열정과 여러 나라를 두루 섭렵할 수 있고, 장애를 뚫고 나가 가장 멀리 있는 행복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당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법률의 구속과 함께 육체적인 나약함이라는 불리한 점을 갖고 있다. 여자의 의지는 끈으로 묶여 있는 모자의 베일과 같아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데,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체면이 발목을 잡는다.

-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을유문화사, 2021, p141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이 인생의 결핍감, 그녀가 의지하는 것들이 순식간에 썩어 무너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 모든 것이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권태의 하품을, 기쁨마다 불행을, 쾌락마다 혐오를 이면에 감추고 있고, 가장 황홀한 키스도 더 큰 관능에 대한 실현 불가능한 욕망만 입술에 남길 뿐이다.

-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을유문화사, 2021, p437




이전 시대의 작품들이 선과 악의 문제 같은 합리적인 질서와 보편의 문제를 다루었던 반면, <마담 보바리>는 개인의 파멸하는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도 현대적이다. 화려한 삶과 낭만적 사랑을 꿈꾸던 19세기 여인에게 권태로운 삶에서의 돌파구는 오직 결혼밖에 없었는데, 그녀에게 열려있던 무한한 가능성은 결혼함으로써 모두 닫혀버린다. 그녀의 남편 샤를은 순박하고 가정적이며 지고지순한 남자이지만, 아내의 외도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감한 사람이다. 아내의 권태와 절망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아내가 화가 난 순간에 화가 난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무감하다는 점에서 그는 옹호해주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남편의 몰이해는 아내에겐 절망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샤를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의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고, 어머니가 짝지어준 과부와 결혼을 하는 등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선택에 있어서도 주체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저 수용적이고 착하기만 한 샤를은 바보스럽고 어리석게만 보였다.




샤를과 대조적으로, 에마는 주어진 삶의 경계 밖으로 넘어서고자 행동하는 인물이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고 손가락질당할 것이 뻔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위험한 길을 선택한다. 가정이라는 속박과 사회적 제약에 갇혀있던 19세기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를 따랐다는 측면에서 에마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마는 애인의 거짓 사랑과 너무도 뻔한 돈의 유혹이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해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결국 그녀가 맞닥뜨린 절망에서 벗어날 길은 죽음 밖에 없었다. 이런 한계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에겐 실패한 저항으로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주어진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어딘가에 더 큰 행복과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으며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한다. 인생에 더 높은 의미나 목표가 있다고 믿어 지금 내 인생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은 현대인들도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파멸케하는 길인 줄 모르고 뛰어드는 사람은 안타깝고 가여웠다.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비극적인 감정에 압도당하고 마는 에마에게서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강요당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겹쳐 보인다.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고 공허함의 자리를 쓸어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마담 보바리>가 여전히 고전의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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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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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의 <기억> 편에는 그녀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국경을 넘던 밤이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그날 밤 일이 “마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생에서 일어난 일”처럼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썼다. “마치 내 기억이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을 잃어버린 그 순간을 떠올리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작문 노트뿐 아니라 처음 썼던 시들을 두고 왔고, 오빠와 남동생과 부모님께 인사조차 못하고 떠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는 그날, "하나의 민족 집단에 속해 있던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적었다. 그녀가 두고 온 것은 시와 가족들, 그보다 훨씬 더 넓고 뿌리 깊은 무엇이었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삶에 대해서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이 책은 조국을 떠남으로써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다시 새롭게 낯선 언어를 배우고 작가가 되며 정체성을 되찾아 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유년을 보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오빠와 가까웠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으며, 상상력이 풍부했다. 이 책에 소개된 짤막한 몇 개의 일화들을 통해서 추측해 본 사실이다. 그녀에게 유년의 행복은 짧지만 매우 강렬했던 것 같다. 머지않아 조국이 차례로 독일과 소련의 침략을 받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고, 극한의 가난 속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경험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던 그녀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남편이 반체제 활동에 연루되면서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 땅에 정착하게 된다. 그녀는 시계공으로 일하면서 처음엔 모국어로 시를 썼다. 훗날 프랑스어를 배운 뒤로는 희곡과 소설을 썼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모국어가 한국어이며, 한국 국적과 한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나 충돌이 없다. 그러나 이민자들, 망명자들, 혹은 입양아들에게 있어, 민족적 정체성이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때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아고타는 헝가리 태생으로 모국어는 헝가리어이지만 스위스에 거주하며 프랑스어로 글을 써야 했다.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던 그녀는 스위스로 망명한 뒤 다시 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문맹’을 경험한다. 헝가리를 떠날 때 챙겼던 두 개의 가방. 그중 하나에는 아이를 위한 물건이, 다른 하나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사전은 현실의 필요인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녀가 붙들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무엇이었다. 인간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또 모국어란 무엇일까. 언어란 우리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 그 이상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면 우리는 과거를 넘어설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언어는 그렇게 자기 인식의 근간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모든 언어 경험이 모국어 안에 축적되어 있다. 모국어로 말하고 쓸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모든 기억과 경험의 상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뿌리를 옮기는 일은 다시 어린 아기로 퇴행하는 일이거나 알맹이 없는 납작한 존재로 꺼져버리는 일과도 같다.

국경을 넘던 밤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말해주듯, 모국어의 상실과 더불어 헝가리인이라는 국적과 민족성(문화)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총체적인 정체성의 상실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은 양가적이다. 혼자인 시간, 고독한 시간이 우리를 사색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답게 만들어 주지만, 근원적으로 혼자이기에, 우리는 늘 존재의 불안을 떠안고 산다. 고독이 깊어지면 고립이 된다. 우리가 원하는 고독이란 사회와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 속에서의 고요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채 홀로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우리가 어딘가에 속하고 고정되기를 바라는 것도,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은 것도 ‘혼자’가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낯선 언어를 새롭게 배우고 끈질기게 글을 쓰면서 그녀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스위스에 거주하며 프랑스어를 쓰는 헝가리 태생의 작가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정체성 또한 지니고 살아야 했다. 그것은 분명 고독을 견디는 일이었을 것이며, 불행과의 힘겨루기였으리라.

함께 국경을 넘은 사람들 모두가 정체성을 되찾는 일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고국엔 망명자들이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투옥되고 중형을 받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그중 두 사람은 더 먼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네 사람은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갔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에 결코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공장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지만, 그녀 안의 복잡하고 다중적인 마음까지 그들과 세세히 나눌 수는 없었다. 그러한 거리감과 이질감이 새로운 삶에 밀착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구분 짓기를 좋아하고, 동질적인 것에서 편안함을 찾는다. 이방인에게는 온정적이거나 냉담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다. 그 양 극단의 시선은 이방인을 타자화한다는 사실에서 동일하다. 새로운 문화와 낯선 언어의 땅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흡수되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시간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불안은 존재의 조건이며, 인생은 혼자를 견디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를 붙들어줄 무언가가 절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 속에 충분히 소속되지 못하고 내 삶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우리를 ‘지금, 여기’에 발붙이기 힘들게 만든다. 삶에서 겉돌고 있다는 기분이 무엇인지는 약간의 외국생활만으로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떠나온 사람들은 그들의 본래 자리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그곳에는 자신과 연결된, 자신에게 속했던 사람들이 있다. 익숙한 음식과 장소와 추억.... 그 모든 것들이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덜 흔들리고 덜 불안해하며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곳에 두고 온 내 삶은 너무나 강력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라서 잊어버리고 무시해버리기가 쉽지 않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속 루카스라는 인물은 여러 면에서 작가 본인을 반영한다. 국경을 넘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 이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점부터, 쌍둥이 형제를 사무치게 그리워함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삶이었을 수도 있을 미지의 삶을 강렬히 상상하고 꿈꿔왔다는 점까지.

그녀는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프랑스어에 익숙해졌지만, 그 언어가 자신의 모국어를 죽인다는 점에서 적의 언어라고 칭했다.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사이, 깊은 상실감이 내게로 번져온다. 그 가운데 글쓰기가 그녀를 지탱해주었으리라는 것만이 의심의 여지없는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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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없는 외출
휘리 지음 / 오후의소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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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설레임과 두려움 속을 오가며 모험과 호기심 속으로 한 발씩 걸음을 내딛는다. 이 작고 용감한 아이에 나의 어린 아이를 겹쳐보곤 했다. 아이가 '나쁜 생각 없이 밤을 만'날 수 있게 해줄 방법은 없을까. 아이들의 ‘허락 없는 외출’을 책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꿈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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