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농민 - 세계화 시대의 농촌발전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 지음, 김정섭 옮김 / 한국농정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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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은 단어에 가두어져 있다. (요즘은 뭐 언어경찰, 언어 선점, 언어를 통한 규정이 워낙 남발하는 시대여서...) 젊은협업농장을 만들고 젊은협업농장 자체에 대해서, 농업과 농민에 대해 특히 청년들이 어떻게 농업을 실천해갈 수 있을까에 대해 설명을 할 때 답답함을 느꼈다. 젊은협업농장과 이들의 상황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을 보고 현실적인 방안을 고민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적절한 단어가 없으면 비슷한 단어를 활용하거나 아니면 아예 풀어서 한참 서술형으로 설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젊은협업농장 청년들이 땅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농산물 생산만이 아니라 농장이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확장해야 하는... 그것을 뭐라고 하지? 이는 단지 소농, 가족농, 전업농, 1종 겸업 등의 기존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젊은협업농장 자체도 가족이 소유, 운영하는 것이 아니니 기업농, 시설하우스 8동이나 하니 대농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수입은 농업 수입이 대부분이니 전업농이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런다고 농장 외의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1종 겸업도 아니고... 이후 원한 것이 아님에도 젊은협업농장은 사회적 농장이라는 단어에 포함되기도 하고, 협업농, 교육농장이라는 다른 단어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규모 확장을 목표로 했던 이전 협업농과 다르고, 체험 위주의 교육농장과도 다르다. 또 다른 고민은 항상 자로 잰 듯이 깨끗하게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기농업을 한다고 하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하여 외부 공급이 많고, 소비자의 요구로 비닐 멀칭도 해야 하고, 청년들이 있으니 연중 생산 가능한 비닐하우스가 필요하고 (이로 인한 비난을 초기에 많이 받아서...). 농민이라고 하기엔 농사 일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고 공부와 지역사회 활동이 많고... 그렇다면 그 단어에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그 단어의 규정에는 맞지 않지만 현실적 방안을 찾기 위한 다른 시도를 계속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주변을 보면 전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한 연구자가 귀농자들을 면접 조사하니 모두 너무나 훌륭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이 모두 동일하여 의아해했다는 말도 들은 듯하다. 소농, 자연, 공동체, 자급자족, 자발적 가난, 공생공락 등의 단어에 묶여 어쩌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모습을 받아들여 대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에 끼워 맞추고 그 단어의 규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면서 누가 더 원칙적이고 훌륭한지를 평가하고 평가당한 것이 아닌가 한다. "소농이라는 용어에는 '우려'의 느낌이, 심지어는 연민의 느낌이 가득 덧씌워지기도 한다."(책 본문 중에서)


이를 적절히 그리고 새롭게 보여준 것이 "농민 농업"이라는, 어쩌면 뻔한 단어였다. 맞다. 농업을 하는 주체가 농민이냐 경영자냐 기업이냐에 따라 그 경영방식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농업을 하지만 자기 존재를 무엇으로 규정하냐에 따라서 운영방식과 목표가 달라지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규모가 크다 적다, 소유 형식이 어떠하다는 것보다는 (물론 이것에 따라 경영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일반적이겠지만, 소농임에도 경영자형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대농임에도 농민농업형, 가족농으로 운영하는 사례도 있다.) 목적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하는가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최근 농민을 농업인으로, 농장을 농업경영체라는 단어로 정부로부터 강요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뭔가 찜찜했는데 그 단어가 가지는 의도를 이 책이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또, 이 책은 다른 방식으로 농민을 구분을 하면서도 완전히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농장마다 조건과 특성이 다른데 어떻게 그것이 칼로 자르듯이 모든 항목에서 구분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농민 농업이 가지는 특성을, 그리고 재농민화를, 그것의 소멸불가능성을 그리고 그 생존을 위한 농민의 소소한 투쟁과 참신성을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가장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농민이 끊임없이 참신성을 통해 그리고 그들의 유연한 투쟁을 통해 그리고 연대를 통해 어떻게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그것도 통계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이 책이 반가운 점은 농민만이 아니라 농촌 활동가들이 읽어볼 책이라는 점이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농민의 현재 상황과 농촌이라는 사회가 도시와 왜 다르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투쟁 방식조차도 말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그곳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수많은 단초들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농촌 활동가만이 아니라, 소위 사회적 경제, 도시재생, 생활SOC, 마을만들기 등 기존의 경제체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활동가들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기존의 도시(근대)적 방식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시 도시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함에도 우리가 머리로 생각한 것과 달리 유일한 경험은 도시적 방식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니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이는 전혀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한데, 그것을 이 책이 보여주고 있다. 단지 농민이 왜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농민은 그러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젊은협업농장에 온 지 6개월 정도 되면 항상 하는 질문이 있다. 지금 생활방식을 이전 도시에서 같이 생활한 직장 동료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은 불가능하다고 답하였다. 나도 이래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하면서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나보다는 더 영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도시의 삶이 뭔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도시의 삶이 자신의 생을 갉아 먹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다른 삶을 찾기 위해 농촌에 온다고 바로 새로운 삶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농촌도 도시만큼 자본의 그림자로 드리워진 상황이기 때문(경영자형 농업의 확장)이기도 하고, 그것보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했다고 내가 바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도 변화되어 새로워지지 않는 이상 그 공간은 어쩌면 나에겐 불편하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공간이 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서울시 은평구의 인구는 483,417명(2018년 9월)이지만 그 면적은 장곡면(54.91km2)의 1/2(29.70km2)에 불과하다. 장곡면 인구는 3,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인구 밀도가 제곱킬로미터당 장곡면은 64명, 은평구는 16,777명이다. 이런 완전히 다른 인구 구조에서 동일한 경제시스템이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더군다나 저밀도로 살고 있는 이 공간은 서울에서 본 적도 없는 (아니, 간혹 6시 내고향에서 본 것이 전부인) 땅을 기반으로 농업을 하는 사람들이 60% 정도이다. 동일하게 가게를 차려 장사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공간을 인구 밀도가 다르고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요한 활동이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농업(아, 도시에서는 농산물은 본 적이 있을 듯하다.)이고, 땅을 기반으로 한다는 차원에서 땅은 재산 축적을 목적으로 살아가던 방식과는 당연히 다른 것이 현실이다. 물론, 지금까지 삶의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는 그리고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들이 특정 출판사를 중심으로 여럿 나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재의 삶과 다른 삶ㅇ를 보여주었던 그 많은 책들이 단지 결과적 삶만을 보여주면서 지극히 결론적인 느낌을 적은 것이고 그 과정은 전혀 보여주지 않음으로 인해, 그 책을 보고 실천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이 공간을 이동함과 동시에 결과를 바로 실행해야겠다는 지극히 낭만적이고 조급하고 공상적인 방법(물론 본인들은 원칙적이고 근본적이라고 말하겠지만)으로 접근함으로 인해 지극히 편협하고 주관적이고 평민의 삶과 분리된 자기만의 삶, 지식인스러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수많은 충돌을 불러일으켰다면, 이 책은 그 공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그들의 일(농업)과 기반(토지)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 어떨 것인가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지 농업을 하려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농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는 또는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방법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또 있다. 바로 본인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이 정책에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동시에 때로는 '기득권' 세력과 또 어떤 때는 더욱 급진적으로 농민의 목소리를 내는 세력과 다투기도 했다는 점이다."(본문 중에서). 맞다. 이 책은 우리에게 기존의 두 길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또는 한 길을 선택하라고 설득하는 책이 아니다. 그런다고 제3의 길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도 아니다. 단지, 다른 다양한 길을 찾아가는 모습들과 이들이 다른 길을 찾아가는 그 지루한 세월과 꾸준한 견딤, 그리고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지역사회, 협동, 참신성, 열림, 부드러움 등을 해박한 경험과 현실적 재분석과 예리한 부드러움으로 설명하고 있다. "농민층은 변방의 존재"라고 하니 역시 그곳이 새로운 무언가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곳임은 확실하다.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이라면 농민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마음에 들면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읽다가 모두 읽어버리면 어떻게 하나라는 안타까움으로 아까워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줄을 박박 쳐 가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생각하던, 하지만 길게 설명해야 했던, 그럼에도 뭔가 부족했던 무언가를 몇 단어로 보여줘버리는 책이 있으면 그것을 나중에 사용해야겠다는 욕심으로 파일 하나에 옮겨 적거나 줄을 쳐 놓는다. 이 책은 옮겨적다보니 아예 책의 1/2을 옮겨 적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부딪히고, 줄을 긋다보니 책 대부분에 줄이 쳐 있어 나중에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는 맹점(?)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특히 일반적으로 붙여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붙어 있어 통쾌한 느낌이 자주 든다. "새로운 농민"이 그 시작이다. 인류 역사화 함께 등장했을 농민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이라는 말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풀무학교에 처음 왔을 때 본 '위대한 평민', '진리의 공동추구' 등의 문장이 생각났다. 평민 앞에 '위대한'이라는 말을, '진리'라는 말 앞에 '공동'이라는 단어가 붙은 문장이 주는 신선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타당한 이질성", "은밀한 발ㅇ해" 등의 단어가 대표적이다. (여럿 있었지만, 일이 많은 시기여서 다시 책을 들춰보기는 힘들고, 모든 곳에 줄이 쳐져 있어 찾기도 힘드니, 알아서 발견하시기 바람.).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강의에 들어왔던 농장 출신 청년을 하루 뒤에 만나 물어보았다. 강의를 들어보니 어때? 라고... 그 친구의 답이 이러하다. 아니, 우리가 맨날 이야기하던 내용이던데요. 단지 멋진 헤어스타일을 가진 키 큰 외국인이 외국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하니 좀 더 멋있게 보이기는 합니다. 라고... 맞다. 우리가 하던 이야기였다. 특히, 강의 후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농장을 보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나의 참신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지속적인 참신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자본의 통제가 불가능한 공유자원, 공유지식, 공유방법을 만들 것. 새로운 참신성은 청년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미처 문장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서술형으로 온갖 사례를 들어 설명하다가 끝내 설명할 수 없어 눈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 (말하다보니 자화자찬이 되어가는 듯하여 중단함.) 아마, 우리보다도 더 잘하고 있는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었지만 시간이 짧아 미처 못했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현재도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루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러한 모습과 문제조차도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위로를 해 본다. 


(추신) 안타까운 것은 지금까지는 명징하지 않아 좀 불안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엔 농업, 농민, 농촌이 이러하고 이러해야 하고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개똥 방향을 주창했는데 이젠, 내가 말하면 플루흐 교수의 주장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그이 생각을 실천하는가로 오해받을 듯하여 안타까울 뿐이다. 책에 저자와 저자 부인, 번역자 사인까지 받아버려서 책을 읽어본 적도 없다거나,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이건 내 경험과 생각이라고 우길려고 해도 근거도 없지만 말하다보면 아마 ㅊ팩에 있는 단어가 몇 개는 나올 듯하니... 오호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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