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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침내 같은 문장에서 만난다 - 일상에 깃든 시적인 순간
강윤미 지음 / 정미소 / 2023년 2월
평점 :
"나의 다른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정확히, 서로의 사유가 닮은 사이일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한 존재를 그렇게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김민섭, <경향신문>, '사람과 세상을 사유하다', 202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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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만든다는 것은 한 작가의 사유를 완성해 주는 일입니다. 숨을 죽인 나무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지요.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주고, 그 사이사이에 스민 바람과 햇살과 비와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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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는 시인입니다. 문청 시절, 제 글쓰기 선생님이기도 했고요. 그녀는 기차를 타고 가며 서투름과 허영으로 가득 찬 제 습작시를 고쳐주기도 하고, 때론 말없이 글을 들여다 보기도 하였지요. 비문과 오탈자가 가득한 내 원고를 보며, 마음 다치지 않게 오랜 시간을 토닥여준 지우(知友)이기도 합니다. 아내가 시인이 되고 난 후 저는 소 뒤걸음질치듯 문학평론가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 주제도 모르고 아내에게 글로 대들곤 합니다. 가끔 티격태격도 하고요. 꼴에 평론가랍시고 당신의 글은 대중성이 부족하다느니, 시장성이 없다느니, 글이 너무 감성적이라느니 별 별말을 다합니다. 문자 그대로 남의 편이 됩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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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책을 받았습니다. 정미소를 운영하는 김민섭 작가님이 만든 책이지요. 그 책의 겉표지에는 <우리는 마침내 같은 문장에서 만난다>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어린 왕자'가 가만 내려다보고 있지요. 어린 왕자 곁에는 커다란 몬스테라가 심어진 화분이 보입니다. 관엽식물로 자라면 자랄수록 잎이 나눠지는 특징을 갖습니다. 그 식물을 먹어본 사람들의 말로는 바나나와 파인애플의 맛이 난다고 하더군요.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가진 그 순수한 중독성의 문장을 가진 이 책의 저자는 제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볐던 제 글쓰기 선생님이자 아내인 '강윤미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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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윤미 시인의 산문 <우리는 마침내 같은 문장에서 만난다>를 들여다봅니다. 한 시인이 견뎌야 했던 간절한 시간들의 사유입니다. 애타게 찾아 헤매던 글쓰기를 향한 시적 고백입니다. 엄마이기 이전에 영화와 여행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한 작가의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글쓰기를 배우시거나 삶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신 분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 확신합니다. 어린 왕자 속의 문장처럼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난 더 행복해지겠지."라는 문장의 속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마침내 같은 문장에서 만나겠지요."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에서 엄마, 아빠의 머리카락이 비슷한 길이로 나부낀다. 바람이 스케치북을 훑고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샴푸 냄새가 풍금 소리처럼 풍길 것만 같다. - P28
이 집의 불이 다 꺼지면 식물들도 잠을 잘까? 그들끼리의 수다가 다음 날 작은 잎으로 돋아나는 건 아닐까. - P95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냥 ‘아름답다’라는 말로만 끝낼 수 없는 일이다. 누구나 어른이 되지만, 주변에 누가 있었느냐에 따라 어른이 되는 과정의 밀도와 질감은 다르다. - P132
내가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때 나의 마음은 비로소 와인 잔에 담긴 와인처럼 아름답게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 P227
포도송이의 시간을 배우려 한다. 한곳에 오래 머물렀지만 투박하지 않고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우아하고 고매하면서 겸손한 포도송이의 시간을 배우려 한다. 포도알들이 모여 송이가 되는 일처럼 책상에 자주 앉는 일이 내가 ‘쓰는 사람’의 길에 가까워져 가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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