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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열다섯 소녀 미우미
마흔다섯 여자 슈코
엄마와 딸 만큼이나 간극이 큰 두 여자의 이야기, 잡동사니는
다소 우리네 정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그 소녀는 이국적으로 생긴 데다가 팔다리가 길고 가늘어서 서양인이거나,
혹은 서양인의 피가 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한눈에 그 아이가 일본인임을 알았다.
자그마한 비키니를 걸친 올록볼록한 몸, 하얀 피부,
머리에는 선글라스를 얹어 바비 인형처럼 멋을 내고,
커다란 가방 하나를 떡하니 안고 아침마다 모래사장에 나온다.
올해로 일흔 네살이 되는 엄마와 함께 푸켓을 여행중인 슈코는
그 곳에서 열다섯 소녀 미우미와 그의 아버지를 만난다.
마흔다섯 슈코의 눈에 비친 열다섯 미우미의 모습은 말 그대로 눈부시다.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미우미의 모습을 관찰하는 슈코에게
엄마는 질투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슈코는 질투라기 보다는 갓난 아기나 새끼 고양이 등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혹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놀라움일거라 생각한다.
미술관련 서적의 번역일을 하고 있는 슈코는
지나치리만치 남편에 대해 열정적으로 집착한다.
하지만 그 열정과 집착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그에게 매달려있는 상태...
슈코의 남편 하라 역시 부인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 역시 쿨(?)하게 생각하는 타입~
그래선지 여러 여자와의 섹스를 즐기고 슈코 역시 그 관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휴양지에서조차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질투에 사로잡힌 그녀는
미우미의 아버지와의 섹스를 선택하는데...
열다섯 소녀 미우미는 어린시절 미국에서 자란다.
건축가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과 전쟁을 지켜보며
결국 두 사람의 이혼까지도 고스란히 곁에서 겪어낸다.
두 사람이 이혼을 하고 얼마 후 도쿄로 돌아온 미우미는
엄마와의 일상생활과 아빠와의 가끔의 여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두 사람과 교류하며 나름 균형감각을 갖고 생활한다.
지나치게 남자에 의존적인 엄마는 애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모습이 하늘과 땅 차이,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히 빛나가다도, 이별과 함께 생활까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엄마의 모습이
미우미에게는 괴롭기만 하다.
남편의 손길, 숨결에도 전율할만큼 남편을 사랑하는 슈코는
지금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남편이 사랑했던 당시, 그 과거의 모습으로 남편에게 비춰지기를 바란다.
"슬퍼해줄 사람이 없다면, 나는 누구와도 잘 수 있다고 봐."
일찍이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슬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한 남편의 잔혹함을 나는 힐난했다.
하지만 그때 남편은 이런 말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실제로 누구하고라도 자야 해."
만약 그렇다면...
남편의 냉정함에 나는 언제나 놀란다.
슈코의 남편 하라는 실제로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아내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다른 여자들과의 섹스가 꼭 필요한...
푸켓에서 돌아온 미우미와 슈코, 슈코의 엄마인 기리코씨는 도쿄에서도 그 만남을 이어간다.
부모의 이혼에도, 엄마의 새로운 사랑에도, 아빠의 바람기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듯하지만 어딘가 아슬아슬한 느낌의 미우미...
여전히 남편의 사랑만을 바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슈코,
애인의 존재여부가 인생의 존재가치가 되어버린 미우미의 엄마,
그리고 또 한여자...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그와의 추억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평안을 얻으며 살고 있는
와타루의 엄마, 사야카
죽은 남편이 손수 만든 가구들, 큼지막한 털실 뭉치가 들어있는 바구니, 의자에 앉아 있는 앤티크 인형에 둘러싸여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여자, 사야카
"추억의 물건들이네요."
엄만가 한마디 거들자 사야카 씨는 손에 든 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잔을 천천히 흔들어 백포도주를 회전시킨다.
그리고 말했다.
"잡동사니들뿐이에요."
잡동사니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아슬아슬함 그 자체다.
때로는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추억이기도 하고 잡동사니이기도 한 그 무엇에 대한 생각에 가 닿았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각자의 사랑을 찾아 헤매이고 있는 그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나~
누구에게나 한번뿐인 인생,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랑의 순간...
완벽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사랑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