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 - 영국정부와 예술 정책
김정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 죽어도 화가는 안 될 거예요." 미술을 시작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했던 다짐이다. 인문학과 예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경제적 효율'을 배우기보다는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의미'를 찾는 여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다. 경제적 효율과 철학적 의미는 현실적 차원에서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치이며, 먹고 살 수 없다면 예술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화가들이 공장식 화실에서 주문을 받거나, 메디치 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의 후원을 등에 업거나, 가족의 사적 보조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 주로 민간 기업이나 재단이 후원자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점만 빼고, 현대에도 이러한 양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업과 미술관의 유착 관계는 과연 '순수 미술'이라는 개념이 정말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예술의 상품화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문명화, 문화주의, 기업문화』는 역사적 시간선을 따라 영국 정부의 예술 정책을 검토하는 연구서이다. 저자는 현대에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미술의 상품화의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며, 미술관과 박물관이 상업화되는 현상이 영국에서 가장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꼽는 핵심 키워드는 '대처 정부의 예술 정책'이다.
이 책은 크게 대처 정부 이전과 이후의 영국 예술 정책과 그 파급력을 돌아보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공공 부문에서 예술을 지원하는 정책이 국민의 문명화와 교양 함양이라는 교육적 목적으로 출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8세기에 대영박물관이 개관한 이래로 영국의 공공 박물관들은 수집가 개인의 소장품들을 구매하여 설립되었으며, 19세기에 테이트 갤러리가 개관했을 때까지도 영국 정부의 지원은 마찬가지로 소극적이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 제도 또한 예술 분야의 예산을 줄이려는 정부 탓에 난항을 겪었다. 연구자들은 이 까닭을 검소한 청교도 전통과, 예술 분야의 성장이 민간 부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믿음에서 찾으려 했다.
예술 기관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은 꾸준히 형성되었으며, 그들 측의 주장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영국의 박물관/미술관에 대한 지원이 적으며 세금 혜택도 적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2차대전 이후 정부는 영국예술회의(ACGB)를 설립하여 예술을 지원하고자 했고, 대처 정부는 예술 기관들이 민간의 보조를 더 용이하게 받을 수 있도록 세제를 개혁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대처 정부의 예술 정책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한다. 그만큼 저자는 이 시기의 정책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대처 정부는 정부 예산의 지출을 전반적으로 삭감하고자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문화예술 기관은 민간 부문에 매각되지는 않았으나, 민간 자본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업문화에 편승했다. "대처리즘은 "자유 경제와 강한 국가"라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윤리로의 회귀를 의미했고, 사치 가의 광고 방식은, 앞서 소개한 1979년 총선을 위한 포스터가 보여주듯이, 이러한 대처의 철학이 구체화되는 것을 촉진했다." (문, 236) 민간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대처 정부는 기업 스폰서십 계획을 도입했다. 이는 기업이 예술 기관의 스폰서가 되고 현금으로 보상을 받는 제도다.
기업이 예술 기관을 후원하는 이유는 첫째로 문화와 친근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서고, 둘째로 광고 효과를 얻기 위해서다. 게다가 미술 스폰서십을 통해 기업은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금전적 이익도 얻게 된다. 저자는 기업이 미술을 통해 적극적으로 광고 효과를 얻은 사례로 영국의 앱설루트 보드카를 든다. 이 회사는 무려 800여 명이 넘는 미술가들에게 앱설루트 보드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의뢰했다. 결과적으로 미술가와 미술관, 기업의 자본은 한 데 뭉쳐 앱설루트 보드카가 "일종의 글로벌 미술관"이 되었다는 광고를 현실화했다.
이러한 대처리즘 퍼포먼스의 영향을 검토하면서, 저자는 미술 컬렉터 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찰스 사치, 그리고 영국 현대미술의 급부상을 가져온 yBa에 얽힌 이야기 등 대처리즘 정책의 다양한 아웃풋들에 주목한다. "21세기 대영박물관의 '위대한 궁전' 또는 '거대한 안뜰'로 직역해 볼 수 있는 그레이트 코트의 '유리 하늘' 아래서는 "접근, 우수함, 교육,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DCMS의 이념에 따라 18세기 중엽 이후 영국이 예술을 통해서 강조한 국가의 명예, 국민의 문명화, 문화주의와 기업문화정신이라는 상이한 이상들이 "돈을 위한 가치"라는 우산 아래에서 마찰 없이 공존하게 됐다." (문, 456) 저자가 그리는 윤곽을 쫓아가면서, 우리는 처음의 그 의문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순수 미술'이라는 개념은 정말 존재할 수 있는가? 예술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