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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 친구의 영성

플라톤이 <국가>의 처음을 좋은 친구에 관한 대화로 시작하고
공자는 <논어>에서 인생의 큰 세가지 즐거움 중에 하나로 친구를 드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좋은 친구란 언제나 우리에게 큰 화두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눈을 돌려 성경을 살펴보면 역시 친구이야기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친구로서 자신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선뜻 사귀기를 꺼려하는 과부, 고아들, 병자, 범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또한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의 친구라고 하니 좀 낯선 느낌을 받으실 분들도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는 제자들의 "친구"라기보다는 "유세(遊說)하던 선생"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혹 어떤 분들은 근엄한 아버지나 열띤 연설을 하는 활동가의 이미지가 떠오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예수는 스스로 제자들의 친구이기를 바랬습니다.
마지날 밤에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 중에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라고 부르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원래 친구란 대등한 관계를 전제합니다.
예수는 마지막 날 밤에 그가 지상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제자들과 친구로 사귀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의 친구가 되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와 서로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은 예수가 보여준 그 "친구간의 사랑"(aphileope)1)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먼저 하나님 자신이지만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인간인 우리를 자신의 대등한 친구로 삼으십니다. 
이때의 친구의 의미는 제자들에게는 아마도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헬라문화의 영향으로 갖가지 "연(緣)"을 통해 유능한 젊은이들이나 유력자들을 자신의 후원자로 삼거나 이 만들어진 관계를 이용하여 일정한 이익에 개입하는 브로커들을 의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친구는 결코 어떤 이익에 따라 관계를 맺고 돌아서는 그런 관계를 의미하진 않았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친구의 모습은 어떤 이익, "운동"을 함께하는 관계 이전에 그와 "생활"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의미했습니다. 

예수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친구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대화하며, 친구들의 삶에 마음을 같이하여 울고 웃었습니다. 생활이 그의 운동방식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의 친구들-형제자매들의 모임이지 계급과 직분이 구별되는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친구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지배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먼저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올바른 이웃으로서 친구된 제자들에게 진정한 타자로서 거울이 되어주었습니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과 같이 서로 대등한 사역의 동반자(partner)요 친구로서 창조된 첫 남녀는 "따로 또 같이" 서야할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먼저 선 자, 지배하는 자, 뛰어난 자로 서 있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섬김의 관계를 어그러뜨립니다.
이 둘은 추방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을 섬기시는 하나님의 겸손하신 섬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섬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신탁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신탁을 스스로 이루고자 형을 속이고, 지배하고 싸워 이기려 했지만 얍복강가에서 먼저 하나님이 지시는 섬김을 통해 섬김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고 죽는 것임을, 지고서 인생의 나머지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도록 하나님께 넘겨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엇갈려진 유언(나도 안다)을 통해 죽는 순간에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진정한 친구는 먼저 허리를 굽히고 고개 숙여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마지막 날 밤 손수 허리띠를 동여매고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 분명히 실천하십니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기에 사역의 처음에 떡의 시험, 종교적 열광주의 시험, 그리고 뛰어나 보이고자 하는 욕망(ARETE)의 시험에서도 마귀의 도전을 격파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나름대로 메시아상을 그리며 자신을 애써 찾아온 무리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변화산의 체험에 머물고자 하는 제자들의 요구도 거절합니다. 
가장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이해했던 베드로가 영광의 길을 바라며 십자가의 길을 만류할 때 예수는 단호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주인-아버지의 인정을 끊임없이 바라는 노예의 근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친구란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타자의 것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자신의 고유한 주이상스2)를 갖는 자기 삶의 주체임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가 바란 것은 자기 삶의 주체인 "친구"이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바란 친구는 자기의 길을 가는 삶의 주체로서 친구를 자유롭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친구로서의 형제-자매애는 율법의 대의였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가 아니라 한가지 의미, 즉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이든지 서로 대등한 주체인 타자로서 친구를 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진정한 친구로 사귀어 간다면 다른 이념, 계급, 문화, 종교, 인종, 성을 지녔다할지라도 그들을  친구로서 서로를 받아 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그만 돌아보면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온 세상의 창조물들, 생명들, 특히 잃어버린 한 영혼의 귀중한 생명의 가치보다 더한 가치는 없다는 사실과 우리들의 다름의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인 편견에 가득찬 것이며 서로가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된 "혼종의 문화-작은 공동체" 가운데 이미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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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ete를 향한 자기 지속의 욕망인 Eros도 아니요, 무조건적인 시혜만을 의미하는 아가페, 단지 인간적인 우정을 의미하는 필레오도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주는 진정한 타자로서의 섬김을 나타내는 말로 새로이 만든 말입니다. 가족간의 사랑 특히, 아바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족애는 가부장의 파시즘 가운데 신음하는 자매들을 생각하여 적절하지 않지만 다들 일장 일단이 있는 개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는 방식이 한가지로만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고 스트로게,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 중에서 어느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새롭게 말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새로운 말보다는 오히려 구약의 전통적인 개념인 헤세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중입니다.
2) 대체로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무한성, 타자의 고유함이라는 레비나스적인 의미이지만, 파편적이고 분열적이라는 라캉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3)우정을 중심으로 윤리학과 신학을 전개하려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 나라를 왕국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고 지상의 왕권 모형이 중심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다스리신다는 것은 오히려 지상적인 지배권력 구조를 전적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스리고 성도는 주님 안에서 서로 각자 형제자매일 뿐만 아리라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겸손하게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부르시고 지배와 굴종,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해방시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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