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인에게 공부란 무엇인가, 2017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이원석 지음 / 두란노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원석 목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 소개를 보니 원래 공부를 잘하시는 분이신 것 같았습니다. 독서량도 아주 많아 보이시기도 하고 공부를 그저 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대로 살아내는데 까지 가자고 하시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는 것도 좋으나, 단권을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다고 하시는 부분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사실 출애굽기 후반부에서 레위기까지, 역대상하에 나오는 족보들,, 그리고 예언서들은 일단 지루하고, 어렵고,, 그 부분을 지나가는 것들이 어려워서 실은 성경읽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는데,,, 


저자는 고전이든, 아니든, 독서에 매우 능하고, 독서량이 많고, 또한 그에 따른 묵상도 많이 탁월하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그 수준에 놓고 이야기 하시는 듯 느껴지는 말씀들은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나같은 사람이 느끼기에는 좀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몸으로 스며 들어야 한다는 말씀에 많이 공감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랫습니다. 읽을 때는 감동을 하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 버렸습니다. 좋다기 보다는 당연한 말씀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됩니다. 



팔복대로 살아보자는 말씀에는 허걱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저는 그것을 또 다시 살아보라는 말씀에는 도리질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두번다시 하고 싶지 않은, 살면 안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다 살아나면서, 심령이 가난하고 낮아져서 주 앞에 겸손히 서게 되는 일을 다시 해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적용 대상이 팔복인 것에는 별로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권별통독] 부분입니다. 이런 생각을 그전에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어떨까,,, 하지만 성경읽기표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은 없더군요. 개인적으로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는 빌립보서를 좋아합니다. 한 20번은 아마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짧기도 하구요. 이 글을 읽다가 이걸 그냥 다 외워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좋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공부에 달렸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머리에만 머무는 공부가 아니라, 몸에 체화된 공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 체화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제 나름대로 덧붙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잘 알고도, 혹은 체화하여 수십년을 이미 실천해 왔으면서도 이제는 영적인 에너지가 이제 침체하여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회는 지칠대로 지쳐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침체하였는가? 라는 명제에 대하여는 많은 의견들이 있겠으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성장'을 하나의 동력으로 여기던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춤에 따라 '동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일어날 필요도 없고, 일어난다 하여도 별 의미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동력은 '성장'이 아닙니다. '성장'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이룩 했다고 생각합니다. 샤마니즘적인 '기복'의 신앙을 버리고 더 깊은 '영성'과 '사명'을 실천하는 또 다른 측면의 '성장'을 향할 때라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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