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갤런 크렌츠 지음, 김문호 옮김 / 지호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수가 죽기 전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만찬”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서는 침대에 누워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실제 상황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이 누워 있는 것은 당시 경건한 분위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의자에서 앉아 먹는 모습으로 바꾸어 그려 놓았다. 사람의 몸, 자세에 선입견이 적용된 사례다.

우리의 몸, 자세는 생리적 현상에 의해 정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의 몸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 생각하기 쉬운 의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의자는 예로부터 신분의 상징이었고, 현대사회에서도 회사 내 간부급 임원의 의자는 보통의자보다 크고 장식이 많아 우리는 한 눈에 누구 의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의자에 앉는 것은 예상만큼 편한 자세가 결코 아니다. 사람의 몸은 일어서기, 걷기, 뛰기, 눕기, 쪼그려 앉기, 책상다리하고 앉기 등 다양한 자세를 하게 되어 있다. 의자에 앉는 자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고 어느 순간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자는 인간공학적으로 볼 때 몸을 오히려 망친다.

등받이가 곡선으로 있는 의자,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의자, 그물망 같은 의자가 척추를 휘게 하거나 관절에 무리를 주거나 인체 장기들을 한쪽으로 쏠리게 한다. 오늘날 하루종일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은 실제로 무거운 짐을 나르는 노동보다 더 위험하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각종 관절 뼈 결림, VDT 증후군 등을 호소하고 있다.

또 의자는 우리의 자세를 정함으로써 우리 생활을 통제한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제자리에 앉아라” “자리에서 조용히 해라”는 말은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왜 공공의 공간에서 쉴 때 누워서 쉴 수 없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의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앉거나 심지어 누울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고 한다. 공부를 잘 하려면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의 학교, 도서관의 책상과 의자는 몸을 망치기 십상이다. 차라리 누워 책을 보거나 일 할 수 있는 것이 덜 피로할 수 있다. 저자는 대학원 시절 침대식 의자에서 공부한 덕을 보았다 한다.

저자인 갤런 크런츠 건축사회학 교수는 사람의 몸에 관심을 가지고 몸을 위한 디자인을 하자고 주장한다. 그녀는 의자를 매개로 한 서양문명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마루바닥, 온돌 등 동양의 바닥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우리 것을 소중히 할 줄 모른체 그저 서양의 것만 따른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든다. 일반 가정에서도 거실에 소파 놓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니 말이다.

* 이 책은 내게 좀 어려웠다. 특히 의자 디자인의 역사는 사전지식 없이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고, 가끔 번역투의 긴 문장은 나를 혼돈스럽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돼지냥 > 메이저와 마이너 사이에서 모순 없는 공존이 가능할까?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장모씨는 ‘외로움의 도가 지나친’ 어느 날, 덜컥 바퀴벌레와의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그 이전에도 바퀴벌레는 그의 방에서 알게 모르게 서식하고 있었을 터이니, 새삼스레 ‘동거’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는, 그 전에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개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뜻이 덧붙여진다.

 

사람이란 타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더우기 좋은 느낌으로 시작할 때는 서로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연애를 할 때도 보라.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나도 그런 적 있는데’ 혹은 ‘나도 그러는데’, ‘우린 통하는 것이 많군요’라며 서로의 공통점을 찾기에 바쁘다. 외로움이 찌들어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관계가 비틀어질 때, 파국으로 치닫을 때는 서로의 ‘차이점’이 튀어나온다. 성격 차이, 의견 차이 등으로 결별을 맞는 인연이 얼마나 많은지. 그네들이 처음부터 도저히 조율할 수 없는 차이로 점철되었을까? 천만에. 그들도 처음엔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며 가까워졌을 터이다.


장모씨가 외로움에 지쳐 바퀴벌레를 동거인으로 맞이하였을 때...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대화를 할 수 있는(즉 서로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서 공통점을 찾아, 발에 밟히는 치약이나 구겨진 침대, 어지러진 책상 등과 달리 ‘동거인’으로 생활을 공유하였다. 처음엔 외로움이 해소된 듯 하여 좋았지만... 곧 차이점이 드러나며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없는’ 상황까지 흘러간다.

개인적인 선에서의 차이와, 사회적인 차이.... 둘 중 후자는 타인과 사회 공동체의 질서까지 받아들여야 하기에(물론 거부할 수도 있다...그러나 성가시고 힘들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라는 소심한 장모씨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한다.

 

사회적 편견과 최하위층...정도의 사회적 위치. 곤충으로 은유된 사회적 약자층(즉 마이너)과, 나름대로 메이저의 껍질을 갖고 있는(장모씨의 사회적 위치는 상당히 아슬아슬하다.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조금만 까딱하면 마이너로 굴러떨어지기 쉽상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그렇게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다 ‘커플링’ 과 같은 사소한 것으로도 원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 경계선상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장모씨의 공존은 그래서 위태롭다.

장모씨는 그나마 다소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이고, 소위 메이저들의 허위 의식을 알기에 마이너에게 비뚤어진 편견을 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역시 내심 마이너로 전락하는 것은 바라지 않기에...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의 짧은 동거>는 바로, 이러한 소시민의 심리를 매우 탁월하게 다루고 있다.

자칫 마이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마이너를 이해하려 하고 그네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나.... 결코 마이너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메이저의 끝자락이라도 좋으니 그 쪽에 편입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너무 무겁지 않게, 곤충과 인간이라는 은유로 매우 위트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거대한 사회적 굴레 속에서 다소의 몸부림은 쳐 보지만, 결국 그 질서에 무릎 꿇는...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자학하지는 않고, 지나치게 뻔뻔하지도 않게 살아가는 장모씨. 약간은 진보적인 체 하지만 결국 사회의 메이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시민의 심리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분열이 끝도 없이 일어나는 <즐거운 나의 방>.

이 작품은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로 탁월하다. 아주 담담하게 절망적인 상황을 멋들어지게 표현한다. <즐거운 나의 방>이라는 아이러니까지 즐겨 가며.

묵직한 절망의 무게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 지탱하면 좀 견디기 수월할까? 그래서 장모씨는 그렇듯 여러 명으로 분열하는 걸까? 하나의, 통일된, 단일한 의식으로는 견딜 수 없기에...


내면의 흐름을 손에 잡힐 듯 풀어내는 솜씨가 무척 대단한 작가다.

적당히 그린 것 같으면서도 무섭게 감성을 후벼파는 솜씨까지, 이런 사람이 그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 아까울 정도이다. 앞으로도 어떤 작품을 보여줄 지 무척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