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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6월
평점 :
결혼(비혼)에 관한 에세이들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씩 다양성을 보이고 있어 반갑다.
한때 유행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기억났다. 최첨단 디지털시대에 20세기 향수를 자극하는 감성적 아날로그st 이름의 소유자라 말하고 싶지만 여전히 삼순이라는 이름은 그때도 지금도 촌스럽다. 드라마의 내용을 빌리자면 '촌스러운 이름에 뚱뚱한 외모를 가진 노처녀 김삼순의 좌충우돌연애담'정도가 되려나? 실연과 맞선을 반복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응원하면서도 난 아직 그 나이가 멀었으니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현빈에게 홀려 그냥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달려라 하니>의 홍두깨 선생님은 어떻고! 노총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상형과는 전혀 무관한, 아버지가 주선해준 색시감과 맞선을 보고 결혼한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대체 결혼이 뭐길래 누가 정해준지도 모르는 결혼적령기라는 단어에 휘둘려 밀린 방학숙제처럼 해치우지 못해 온 사회(거짓말 조금 보태 온 우주)가 안달인걸까? 시대가 변했다며 통념에 갇히는 것은 진부하다며 원치 않는다하면서도 정작 나이를 먹을수록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에 안전하게 귀착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작동한다. 또 그런 속내가 들키면 속물로 치부될까 정작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작가의 부모도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듯 딸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독촉하고 여자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행복', '여자=출산'이란 공식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정작 딸이 무얼 할 때 행복한지는 묻지 않는다.
가족뿐만이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사랑과 관심이라는 미명하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상처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타인에게 들었던 무례한 이야기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줬을 무례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무거운 주제에도 어둡지 않고 술술 읽혔던 이유는 부모의 기대와 타인들의 평범함이란 기준에 미달될까봐 (대쪽같지 못한) 순간순간 흔들리는 작가의 속내를 털어놔서 오히려 공감을 자아냈던게 아닐까. 매번 흔들리면서도 뿌리째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흔들 균형을 잡는 그녀와 우리들 모두가 애틋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항상 행복하진 않지만 즐겁고 행복한 매순간은 있다. 그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하는게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롯이 혼자서 즐기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예쁜 옷을 입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산뜻한 향수를 뿌릴때 꼭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즐기는 사람!
이제 가족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다. 개인이 개인과 만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고 때론 혼자서 존재하기도 한다. 촌스러운 이름의 김삼순도, 자신의 이상형과 다른 맞선녀와 결혼했던 홍두깨도,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미혼, 비혼자들이 반복되는 버거운 일상과 제도권의 안정감 없음과 불안한 미래에도 설레임과 두근거림, 낭만을 즐기는 각자 한 명의 개인인,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바란다.
더이상 결혼이 행복의 동의어는 아니다. 또한 행복은 셀프다. 이십대든, 삼십대든, 사십대든... 여전히 두근거리는 일들은 항상 있을거라 생각한다. 꼭 결혼이 하고 싶다면 오롯이 혼자 즐길줄 알아야 누군가와 함께 할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우리는 결혼을 하기전에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이를 먹었다고 거저 얻어지는 어른이 아닌 책임과 의무 같은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그런 어른. 아직도 엄마와의 탯줄을 끊지 못한(아니 끊지 않는) 자발적 미성년이 너무 많다. 결혼 후 당연히 부모가 되는게 아니라 생명을 가져도 되는지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노처녀, 노총각이란 농담. 하나도 재미없는데다 아주 오래되고 촌스럽기까지하다. 그럼에도 같이 소리높여 발끈하며 싸우기보단 조금 능글맞으면서 찰진 (일명 개드립) 개그로 응수하는 작가를 보니 무거운 주제임에도 가라앉거나 우울하지 않다. 되려 낄낄대며 읽을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