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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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크게 흥행했던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리 오래된 드라마는 아니고 불과 몇 년 전 드라마로 여전히 종종 TV에서 재방송을 하기도 하는 드라마이다. 그 이전에 계속 흥행했던 응답하라드라마 시리즈에서 가장 최근에 막을 내린 것으로 1988년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의 사회상을 서울 쌍문동이라는 골목집들의 인정넘치는 삶을 개인의 추억과 함께 어우러 녹아냈던 드라마이다. 조남주의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응답하라 1988> 시대의 추억을 공유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시작하여 그때부터 시작된 체조 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부터 2000년대, 현재의 재개발 열풍이라는 자본주의의 무지막지한 파도에 휩쓸려 태어나고 자란, 30년 이상 거주했던 일명 달동네라 불릴 수 있는 추억이 깃든 삶의 장소를 떠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담담하면서도 재치있게 펼쳐진다.

 

  여기서의 재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입장이다. 주인공 고마니가 처한 현실은 만만치 않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녀는 36세의 회사에서 막 해고당한 시집가지 않은 여성이다. 여성, 백수, 30대 후반의 나이, 가난은 사회적으로 불리한 모든 요소들이 집합되어 있다. 날 때부터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하지 않아 가난한 것이 아니고, 일할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는 열심히 주어진대로 살아넘겼으나 열심히 발버둥치는 것에 비해 그녀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10살 무렵, 서울올림픽을 보고 체조 선수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선수를 목표로 하는 그녀 또래의 아이들이 일찌감치 시작하는 그 세계에 늦게 입문하게 된다. 팍팍한 그녀의 집안 사정에 비해 여러모로 금전적인 필요가 많이 요구되는 세계에서 그녀는 집안살림을 털어가면서 체조부가 있는 사립학교로 전학도 가고 학교비 외의 부가적인 연습비도 납부했으나 또래의 아이들이 그녀보다 풍족한 조건에서 일찍 시작해 이미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지원도, 재능도 부족했던 그녀는 시작점이 달랐고 그로인한 격차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체조 선수에 대한 그녀의 막연한 꿈과 이상은 다른 아이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적인 문제와 상황에 대해 인지하는 것이 뒤늦었던 것은 매울 수 없는 격차를 불러온다. 결국 어린 시절 가장 강렬하게 품었던 꿈을 일년 만에 내려놓으면서 가난과 자신의 위치를 현실 속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계기가 된다. 그녀가 살던 동네의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어울려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다른 세계의, 다른 동네의 사회와 부딪히면서 가난이라는 현실을, 출발선이 다른 현실을 직접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원장도 그렇고, 코치도 그런 것 같고, 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아마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 되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p.152)

 

11살의 그녀는 가장 큰 첫 실패를 경험한다. 체조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멀어졌다. 하지만 실패 이후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냄으로써 한 단계씩 어른이 되어간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비루하고 비참한 많은 순간을 겪지만 그녀는 절망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순간순간을 버티어 나간다. 재개발을 앞두고 오랜 세월을 살았던 그 골목길과 언덕배기 진 동네를 떠나는 순간을 맞이하는 36세의 그녀의 시점에서 회상을 반복하는 내레이션은 그 힘겨웠던 순간들을 어떻게든 지내온, 당시의 강렬한 감정에 파묻히지 않고 과거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담담하게 되짚어보는 어조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독자들은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순간으로부터 스스로의 감정을 어느 정도 지켜낼 수 있다.

   고마니는 고만고만한 그녀 세대의 시대상을 대표하면서도 독특한 캐릭터이다. 순진하고 여기저기 치이는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그녀 안의 긍정의 힘이랄까,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 중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이 힘겹지만 그럼에도 다른 이들을 속이지 않고 순리에 맡기며 선량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위선적인 것이 아니라 닥친 불행에, 고난에 절망하더라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에 몸을 맡겨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며 버텨 넘기는 힘이다. 그런 그녀의 힘은 억척스럽고 엉뚱하면서도 순진한 그녀의 어머니나 닥친 상황에서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살아가는 그녀의 아버지, 마음에 꺼리지 않는 보통 인간의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도 없는 살림이면서 재개발을 앞둔 동네에 투자를 위해 집을 사러 온 남자에게 재개발이 무산될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계약을 무를지 고민하는 고마니 가족은 제 코가 석자인데 남 걱정하는 듯 보여 우스우면서도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앞두고 양심의 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고마니 가족은 집을 팔고 서울 근교로 이사하지만 그 가족이 고민하는 과정은 짧게나마 책을 읽는 순간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채플린이 말했던가. 루마니아의 체조 선수 나디아 코마네치를 동경하며 품었던 10살 소녀의 꿈은 비극적으로 좌절했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크고 작은 포기와 실패와 거절”(p.188)을 겪었으나 삶은 계속되었다. 누구나 꿈을 영원히 품으며 그것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한 수많은 꿈들과 희망이 점멸하는 과정은 반복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p,189)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처럼 고마니와 그녀 가족의 삶은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삶 중의 하나일 뿐이다. 실패와 거절을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비극의 연속이지만 또한 지나가리라세월의 흐름 뒤에서 그녀의 털털한 내레이션으로 거리를 두고 접하는 삶은 유쾌했던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심각하기보다는 웃음짓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이 쉬이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치열하게, 자신이 할 있는 것들을 하면서 매 순간을 열심히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고마니가 과거의자신과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읊을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실패와 좌절로 인한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감내하고 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이 이렇게 힘들어도 현재의 이 순간 역시 10분 뒤, 하루 뒤, 일년 뒤에는 과거가 되어 지나가 버리리라는 마음이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힘과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루한 삶은 계속될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 지난 후의 시간에서 돌아보는 것은 희극이 되리라는 마음이다. 살짝 눈물 섞인 희극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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