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지 1 -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나고
김정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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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부사장님의 강력 추천으로 읽게 된 삼한지는 현재까지 내게 많은 영감과 자극이 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삼국지의 한국판이 드디어 나왔구나’, ‘드디어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근데 과연 삼국지의 아성에 견줄만할까?’라는 것이었다. 제목도 삼국지의 아류마냥 비슷하게 흉내 낸 꼴이 정확히 삼국지의 매니아를 겨냥한 것 같은 마케팅 전략으로 보여서 처음에는 얕잡아 보는 구석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1권을 읽고 난 뒤, 작가의 사료조사가 어느 정도 치밀했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디테일하고 꼼꼼하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책을 내기 위해 10년간 고생했다는 후의 얘기를 듣고는, 독서에 방해가 되는 편견을 바로하고 경건할 정도의 예의와 태도를 갖추고 독서에 임하게 되었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김정산의 삼한지는 매권 테마를 달리하여 같은 시기 나라와 나라를 오가며 각 인물들과 각 사건에 매우 충실하다. 역사적 사료로 보나 대중적 친밀도로 보나 신라로 치우칠만한 무게중심을 훌륭하게 분배하였고, 각 나라의 중심인물들이 그 권에 한해 주인공이라 불려도 무방할 만큼의 비중으로 쓰여져, 각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눈물겹도록 친절하였다. 어쩔 수 없이 처음과 끝은 신라 인물들이 주를 이루고 결국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용춘과 서현의 일족이지만 역사 전개상 가장 무난한 길을 선택한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이 나온 뒤로 고구려 붐이 일었고, 방송3사에서 내놓은 소재 모두 고구려 배경이라는 점에서, 삼한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차지하는 위상이 신라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방영 중에는 몰랐으나 각 사극이 김정산의 삼한지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역사적 패배자를 단지 패배자로 몰아붙이지 않고, 위대한  패배자로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중국 삼국지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나는 중국의 역사를 잘 알기 전에는 유비가 역사의 승리자인줄로만 알았고, 사마염이라는 정체모를 인물에 대해서는 깜깜했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삼한지를 읽고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당차고 호방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나 역시 그들이 수, 당이라는 대국에 억눌리지 않고 전략적으로 맞서는 모습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하지만 두 인물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을지문덕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있었기에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어 양광부대를 물리칠 수 있었고, 연개소문은 때 아닌 남진정책과 자신에 대한 중신들의 견제로 뜻을 펼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의 과감한 독단으로 이루어진 쿠데타는 분명 을지문덕의 그것과는 다른 역사적 해석을 나을 수밖에 없다. 무서운 독재자로 군림하던 시절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힘없이 몰락한 것과 맞물려, 묘하게 지금의 북한상황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강인함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에 대한 인상은 외교력으로 대표되는 신라와 내정에 대표되는 백제에 비해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성과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력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가를 알려주고 있다. 재미있었던 점은, 당주 이세민과 연개소문, 김춘추가 당에서 호형호제하고 지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각 나라의 군주가 되기 전 큰 인물들이 한동네에 있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서현과 용춘의 관계나 춘추와 유신, 을지유자와 연개소문의 관계도 흥미로왔지만, 친했던 세 인물중 이세민의 형제암살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이 절연하고, 이연과 춘추의 관계가 유지되었던 점은 사사롭다고 할 만한 개인사가 역사에 얼마만큼 큰 파장을 가지고 올수 있는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삼한지에서는 또한 여성인물에 대해서도 애정을 과시하는데, 5권의 부제 자체가 여왕시대인 것이나, 4권에서 진평왕의 세공주를 다루는 태도에서 작가의 인물에 대한 애정을 느낄수 있었다. 삼한지에서 몇 없는 로맨스중 백미를 이루는 것은 당연 서동요의 소재가 되었던 마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이야기이고, 그에 못지 않은 것이 김유신의 중개로 인한 춘추와 문희 이야기, 그리고 김춘추의 부모인 용춘과 천명이나, 김유신의 부모인 서현과 만명에 대한 사정까지 흥미진진하다. 최초의 여왕이었던 덕만(선덕여왕)의 생애도 자못 애절한 데가 있는데, 생각해보면 진평왕의 세공주(덕만,천명,선화)가 모두 그러했던 것도 드라마틱한 구석이 있다.




이러한 모든 재미요소 뒤에는 한 나라의 흥망성쇄와 관련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상황과 정황들이 있다. 고구려는 국제 정세에 어두운 면이 시발점이 되어 권력자 형제들의 암투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해 패망하였고, 백제역시 왕과 귀족사이에 잠재되었던 위화감이 불거진 것이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라패망의 가장 큰 원인은 자중지란(自中之亂)에 있다. 어진 왕은 충신의 말을 듣고 간신을 볼줄 알며, 우유부단한 왕은 간신에 휘둘려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다. 독단적인 왕은 충신이나 간신이나 할것 없이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시키는데, 본 소설에서는 의자왕이 그랬던 것 같다. 신라의 진평왕은 우유부단한 왕의 전형이고, 김춘추와 법민, 그리고 당주 이세민은 어진 축에 속한다. 결과론적인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상에 나오는 이미지로는 그렇다. 내부분열만큼 나라를 허약하게 만드는 건 없다. 가야의 피와 신라의 피가 섞인 김유신이 골품제로 찌들어있던 신라의 흉흉한 민심을 하나로 뭉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귀족들의 자제인 화랑이 전쟁에서 앞장서 싸우다가 전사하는 모습들은 고대 로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연상케한다. 동방의 로마제국이라 불리던 백제는 그러나, 신라에 비해 그 정신만은 부족했던것 같다. 백제는 과거 백제와 십제라는 형제나라로 존재했었다. 고구려의 담덕침략때 십제는 간신히 공물을 바치며 화를 면하고 백제는 왕이 왜로 도망해 모든 신하와 백성들을 뿔뿔히 흩어지게 하는 등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는데, 결국 의자왕대의 굴욕은 그 극치를 달린다. 신하들은 왕을 불신하여 전쟁에 자제들을 내보내길 꺼려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내부화합에 중점을 두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데 성공했다면, 그 많은 충신들과 용맹한 장수들을 잘 이끌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권력자의 가장 큰 미덕은 정신적인 단결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연개소문도 덕이 부족하여 겁쟁이 신하들만을 양산해내었고, 의자왕은 아집이 세어, 성충같은 충신들을 유배보냈다. 급변하는 국제양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그럴때일수록 간신이 많아져 리더쉽이 필요하고 충직한 신하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합일과 분열이 국가 흥망성쇄의 가장 큰 키임을 삼한지에서는 가슴에 와닿게 알려주고 있다.




10권의 길고도 아쉬운 장정을 마치고나서, 당차다는 생각이 들었던 제목 - ‘삼한지’라고 이름 불려 질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는 재미없다고 일단락 지었던 과거의 경솔함에 후회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런 나의 편견은 한국의 역사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섣부른 단정으로 알려 하는데 게을렀고, 둘째로는 한국 국사교육의 문제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괄별 암기식 교육은 국사를 참 고리타분하고 재미없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국사시간에 지금의 마동일화, 연개소문, 을지문덕과 김유신, 김춘추에 대해 소설에서처럼 디테일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 있었다면 현재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억지로 연습장을 까맣게 달구며 외웠던 사실들은 고등학교 졸업후 거짓말처럼 잊혀졌고,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이 역사적 사실이 어떤 장소에서 언급될때마다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김정산의 삼한지를 읽은 지금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모든 사건들이 정리되고, 역사 프로그램을 볼때 반가움으로 변해 열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더 깊이, 더 많이, 확장해서 알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김정산의 삼한지는 그런 소설이다. 아직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삼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추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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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승부사들 - 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돌파한 사람들
서신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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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조선인물들을 기대했지만, 특정 승부욕을 가진 인물들의 일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책의 부제가 이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돌파한 사람들'

 

이 책의 인물들이 승부수를 건 대상은 다른 출중한 경쟁자가 아니라, 당대의 관습과 제도, 출신과 환경이었다.

우리나라 위인전의 헛점, 혹은 약점으로 짚히기도 했었던 '범상치 않은 출생'과 '타고난 재능'을 번번히 드러낸것에 불편했던 것일까.

작가는 그런 신화적 위인을 꼬집기라도 하듯 비천한 태생의 낮은 신분적 위치와 열악한 환경을 갖춘 이들을, 사회적 차별과 천박함의 대상이었던 이들의 특정학문으로써, 순전히 능력으로 그런 장애들을 극복한 사례들만을 다루었다.

 

이 책의 첫번째 미덕은 기존 기술자의 과장된 기록과 미화된 흔적들을 과감히 삭제하고, 한명한명 냉정하게 당대상황과 인간됨됨이를 연결지어 개연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미덕은 찾기 힘들었을 제약의 근거들을 제시하며 그런 힘든 역경을 딛고 보석같은 업적을 남긴 근성을 강조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이들 - 이들의 업적이 곧 왕의 업적인양- 과 한국사회 특유의 '가려진 차별'을 받았던 분야의 이들(상례:유희경, 비파:송경운, 학자:황윤석, 천문:김영, 바둑:정운창, 출판:장훈)까지 재조명했다는 데 있다.

 

이 책을 보고 우리나라 위인전의 수준이 한단계 상승했다는 느낌이 들어 반갑다.

계속 답습되는 신화적 소재와 범잡하기 힘든 타고난 재능을 접할때마다 한숨이 나왔고, 외국의 위인에 비해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이었던 한국의 위인들이 각각의 인간미와 함께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유독 보수의 힘이 강한 나라이다. 기득권 계층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재능을 채 피우지도 못한채 억울한 삶을 살다가 간 이들도 많을것이다. 허나, 이들이 재능을 인정받은 조선시대보다 더 하랴. 이 위인들이 볼때 현대의 한국은 만민이 평등하고 숱한 기회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약속의 땅일지도 모른다. 이들을 보면 때때로 환경탓, 제도탓을 했던 자신이 심히 부끄러워진다.

 

이책에 나온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천한 태생에 벽지의 약골, 장애인까지 있다. 하물며 신분제와 유교사상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조선시대  아닌가. 절대 불리한 시대와 승부한 위인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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