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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들 - 냄새로 기억되는 그 계절, 그 장소, 그 사람 들시리즈 4
김수정 지음 / 꿈꾸는인생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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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선택한 당신이라면 ‘냄새에 관한 책이라니. 나만 그런게 아니었네.’ 하면서 반가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프롤로그는 정확했다. 나 말고도 냄새에 집착하는 냄새 집착녀가 있단 말이야?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펼친 이 책, <냄새들>. 책에서 향기가 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아는 냄새인지, 모르는 냄새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저자가 뿌려 놓은 향기를 따라 글을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향을 음미해 나갔다는 표현이 맞을라나.

작가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다. 아무래도 세대가 비슷하다보니 저자가 겪은 냄새가 묻은 과거의 곳곳에 나도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대학 신입생 때 입은 아디다스 저지나 청치마라든지 클럽에서 박명수의 쪼쪼댄스나 추고 싶어 한다든지, 어렸을 적 비디오를 보다 빠졌던 홍콩 영화라든지(저자는 <중경삼림>에 푹 빠졌지만 나는 <천녀유혼>에 빠졌었다.) 세대를 추정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추억들이 모든 글마다 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난 그녀를 모르지만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만 같은 반가운 마음으로 그녀의 흔적을 읽어 나갔다. 게다가 저자는 향기 덕후에 영화기자였어....... 책을 통해 마치 운명의 친구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 우리 세대의 많은 친구들은 아마 <냄새들>을 읽으며 그런 친근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특히 냄새를 추억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작가는 캐나다, 일본, 프랑스, 스페인, 그 외 유럽 등 해외를 다니며 그곳을 냄새로 기억한다. 그녀가 그라스에서 사온 파우더리 하면서도 플로럴한 향은 무엇일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글자에서 풍기는 바르셀로나의 추로스와 마늘 굽는, 그리고 햄버거의 냄새는 바르셀로나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을 들게끔 했다. 특히 후쿠오카와 작가의 추억을 연결하는 마마스&파파스 멘치카츠의 향기는 나를 2019년도로 돌아가게 했다. 크리스마스 즈음 동생과 함께 갔던 후쿠오카의 겨울 향기가 코에서 물씬 풍겼다. 모모치 해변의 바다향과 함께 잠깐 몸이 바닷 바람에 둘러 쌓인 느낌이 들었다.

<냄새들>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해주었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추억을 공유하는 어느 순간, 나 역시 내 자신의 추억과 연결됐다. 학창 시절 뛰노느라 땀내 가득했던 교실, 대학시절 향기롭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위축됐던 부끄러운 기억들, 여행지에서 느꼈던 그 나라만의 날씨와 지형에서 오는 내음과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금 기억하며 행복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최근 다시 한 번 자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자 덕분에(또는 때문에) 조금 더 부모님과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이상하게도 엄마 아빠가 세탁기를 돌리면 빨래에서 쉰내가 나는데 그 쉰내가 그리워 질 것 같기도 하고, 집 안 가득한 된장찌개의 냄새도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그리워 지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았다. 나 역시 엄마 아빠가 만들어 내는 냄새들, 게다가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냄새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서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졌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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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경우
이미란 지음 / 예서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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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굉장히 신선한 소설을 읽었다.

 

<너의 경우> 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로, 문예창작학과의 교수님이 쓰신 소설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소설에 대해 강의하시는 분의 글은 어떨지! 그런 궁금함이 가장 컸다. 책을 읽어보기 잘한 것 같다. 굉장히 정형적이고 딱딱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낯선 시점(2인칭)을 선택한 것부터 해서 스토리의 소재, 전개 등이 신선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을 몰입시키지 못하는 글도 있다. <너의 경우>를 읽으며 궁금해지는 전개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은 독자를 몰입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첫 번째 단편 <당신?>은 굉장히 강렬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중년의 남성이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 과학기술 신봉자가 되어 몸을 개조하여 나가는 과정을 부인의 시점에서 쓴 이 글은 ‘불편한 골짜기’를 유발하기까지 한다. 소설에서는 변해가는 남편을 보며 ‘나’가 영화 트랜센던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남편 행동은 영화에서보다 더 불편해....... 여튼 굉장히 이질적인 감정을 가지고 부인의 불안을 따라가다 보면 충격적인 결말에 다다른다.

 

이인칭 시점은 소설에서는 굉장히 낯설지만 사실 요즘 사람들한테 가장 적합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타인의 행동이나 말 등을 통해 본인의 생각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타인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본인의 심정을 털어놓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된 오늘날에 알맞은 글쓰기 방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는지도. 세 번 째 이야기인 <일박 이일>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며느리의 여행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인칭 시점으로 전개한 게 정말 기가 막힌 소재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튼 간만에 읽은 국내 소설집이었는데 하루 만에 완독했을 정도로 문장도 깔끔하여 술술 읽히고 도저히 궁금해서 그 다음 이야기들을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전개에 감탄했다. 수록된 단편 중 <너의 경우>에서는 단편소설 수업의 진행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는데, 소설 내용과는 별개로 글 쓰는 과정 자체가 본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점에서 <너의 경우>를 읽은 하루의 시간은 말하지 못하는 그 결말, 그것에 대해 글을 써 보는 용기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기도 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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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카드 1 와일드카드 1
조지 R. R. 마틴 외 지음, 김상훈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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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으로 SF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간 조지 R.R 마틴. 그를 필두로 하여 SF계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모여 만든 '와일드카드'가 존재하는 세계가 만들어졌다. 현실의 인물과 시건들을 절묘하게 픽션으로 바꾸어 써 내려간 <와일드 카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들을 '와일드 카드'가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한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와일드 카드를 뽑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이 판타지 세계에선 이따금 현실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 풍자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해학으로 보이는 판타지적 상황들이 재밌었고, 역사적 사실들의 재창조 역시 신선했다. 한국전쟁, 맥아더 장군 등 내가 아는 세계사 지식이나 등장인물이 나오면 어떤 식으로 픽션으로 바꿨을 지 더 궁금증을 자아냈다. 세계사 지식이 해박하지 못한 나에게도 신선했는데, 아마 세계사를 잘 아는 독자가 읽었다면 나보다 더 숨은 의미를 잘 찾으며 읽지 않았을까 싶다.

<와일드카드>의 재밌는 점은 바톤 터치를 하듯이 각 장을 다른 작가가 써 내려가면서 하나의 세계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와일드 카드라는 소재로 다른 세계를 풀어나가는 것인가 했는데, 작가들은 서로의 필력을 합쳐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글의 문체나 캐릭터 성격의 통일성은 떨어지는 감이 있으나 각 장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다르다. 똑같은 캐릭터의 느낌도 좀 다르다. 와일드 카드의 에이스 능력을 얻게 된 유부녀 브라이스와 외계인 타키온이 '월터 존 윌리엄스'의 <증인>의 장에서는 이성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 둘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멀린다 M. 스노드그래스의 <실추의 의식>에서는 생각보다 감성적인 사람들로 느껴진달까. 그리고 2권의 조지 R.R. 마틴의 <셀 게임>에서 역시 브라이스의 기억에 시달리는 타키온의 이야기가 나오는 식으로 계속 하여 이야기들은 하나로 이어진다. 아주 2권이나 되는 소설이지만 각 장의 개성이 다르기에 지루함 없이 쭉 읽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졸면서 겨우겨우 봤던 영화 <왓치맨>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한 때는 특별한 능력을 지는 영웅들이었지만 시대에 밀려 뒷전신세가 되어버린 일반인이 아닌 자들. 미래의 얘기였던 그 영화와 다르게 <와일드 카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픽션이지만, 이 속에서도 에이스를 뽑은 자들이 국익과 자신의 신념에 맞게 일을 하다가 숙청대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와일드 카드 에이스들의 능력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권력자들은 와일드카드 에이스들을 탄압한다. 또한 조커들은 그들의 흉측한 모습으로 인권조차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원래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스티븐 리의 <꼭두각시> 에서 숨어지내던 조커들이 인권을 위해 거리로 나와 대항하는 모습은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SF작가들이 펼쳐낸 <와일드 카드> 속 세상은 SF와 현실 그 중간쯤 존재할 법 하다. 그렇기에 더 푹 빠져서 읽을 수 있었다. 현실 역시 와일드카드가 존재하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주어진 에이스 카드(특별함), 누군가에게 주어진 조커(부당함), 누군가에게 주어진 스페이스 2(애매함). 이 사회 속에서 와일드 카드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 우리는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와일드카드 바이러스가 우리의 세포속에서 언제 발현 될 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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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제국, 프리미어리그 - 가장 부유하고 파괴적인 스포츠 산업이 되기까지
조슈아 로빈슨.조너선 클레그 지음, 황금진 옮김 / 워터베어프레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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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날두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12년만에 돌아왔다는 기사로 스포츠면이 떠들석했다. 이적시작에 어마무시한 돈이 오고가고 있는 프리미어리그. 그러나 프리미어리그가 지금의 세계적인 명성을 당연하듯 얻게 된 건 아니다. 그 역사를 들여다 보면, '축구'를 위한 많은 도전적인 투자와 노력들이 존재했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축구의 제국, 프리미어리그>는 1992년, 프리미어리그의 설립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을 서사한다.

믿기진 않지만, 1992년 이전엔 축구로 돈을 번다는 상상을 할 수도 없었다고. 축구장은 허름하고 술냄새 가득하고, 더럽고 위험이 도사리는 그런 장소였으며 축구는 할아버지 뻘이나 보는 한물 간 스포츠였기에 데이비드 딘이 83년 아스날의 지분을 사들였을 때 그의 친구들은 혀를 끌끌 찾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스콜라, 마틴, 이렇게 진취적인 40대 3인조의 축구사랑은 영국 축구 부흥에 불을 지핀다. 이 시작점이 흥미로웠던 것은 요즘의 트렌드가 '주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말하는 회사의 주식을 매수하는 건 심장 쫄깃해지는 일인데 축구부흥의 기류를 어떻게 읽어내고 미친둣이 주식을 사 들였던 것일까? 여튼, 처음부터 유명한 줄 알았던 프리미어리그가 빈깡통 취급을 받는 주였다니 놀라웠다.

이 책에선 시대별로, 그리고 구단 별로 있던 사건에 대해 정리하곤 한다. 이적시장의 비하인드는 축알못인 내가 봐도 흥미로웠다. 내가 축구에 좀 관심을 가졌을 때즈음은 호날두의 레알마드리드시티로의 이적이 결정되고 난 후였는데, 이때의 호날두 이적의 전말도 설명하고 있다. 열일곱의 호날두가 다른 팀이랑 계약을 하게 될까봐 납치하듯 영국으로 그를 데리고 왔던 퍼거슨은 2008년, 호날두가 레알마드리드와의 계약서에 서명할까봐 또 충격적인 얘기를 하는데...

"네가 레알마드리드로 가고 싶어하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너를 지금 그놈한테 파느니 지금 이 자리에서 쏴 버리고 말겠어."

미저리 같은 퍼거슨의 행동은 이적을 1년 지연시켰지만, 2009년, 호날두는 결국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로 레알마드리드로 떠난다. 그리고 유벤투스를 거쳐, 다시 맨유로 돌아온 호날두. 한국에서의 만행으로 비호감으로 바뀌었지만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기도 한다.

이제 막 2021-2022 프리미어리그가 시작한 이 시기에 프리미어 리그라는 스포츠 산업의 시작과 부흥, 위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그리고 팀 저마다의 각종 이슈들을 담고있는 <축구의 제국, 프리미어리그>를 읽고 나니 프리미어리그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또한 투자금, 이적료, 티켓료, 중계권료 등 어마무시한 돈이 오가는 세계적인 거대한 사업의 장으로 성장한 산업으로서의 프리미어리그 면면을 본 듯 하여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과연 상상조차 안되는 기하급수적으로 오가는 그 돈의 규모가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 것일지, 참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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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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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답도 내놓을 수 없어. 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법률이 정했으니까 참으라고. 도대체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누군가의 가해로 인해 세상을 떠난 피해자, 피해자를 잃었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피해자의 가족, 그리고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가해자들. 한국의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은 국민들이 납득하기 힘든 짧은 형량을 받고 다시 사회로 돌아간다. 이미 죽어버린 피해자의 남은 인생은 그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고,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도 그 형량보다는 훨씬 길 것이다.

여기 중학생 딸 에마를 잃은 나가미네가 있다. 축제를 간다던 딸은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곧이어 나가미네는 인간답지 못한 비행청소년들에게 납치당한 본인의 딸이 성적으로 유린 당하는 영상을 보게 된다. 마침 나가미네의 눈 앞에 영상 속 짐승 중 하나가 나타났다.화가 난 나가미네는 그 짐승보다 못한 청소년을 찔러 죽인다. 나가미네는 잘 한 것일까, 잘못한 것일까? 이곳은 법치국가, 당연히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법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가족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아마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나도 죽일 것 같아."

<방황하는 칼날>은 딸 에마를 잃은 주인공 나가미네가 딸 죽음의 실체를 알게되고,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청소년 가이지를 죽이기 위해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단 하나, 법은 죽은 에마의 사라져버린 미래를 보상해주지 않는다. 법은 뉘우침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청소년 가이지에게 갱생할 기회를 준다. 피해자와 그의 유족들의 슬픔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사건을 여러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들의 시점에서 다루고 있다. 가이지를 추격하는 추격자이자 살인용의자로 경찰에 쫓기는 나가미네, 정의에 대해 생각할 겨를 없이 나가미네를 수배해야 하는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오리베, 가이지에게 맞는 것이 두려워 에마 살인사건의 단서를 몰래 제공하며 전전긍긍하는 마코토, 나가미네를 도우며 자신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와카코, 가이지가 저지른 만행에 딸을 잃은 또다른 피해자 아유무라. 각 인물의 시점이 시작할 때 마다 그 인물이 된 듯 생생하게 기분이 와닿는다.

심리묘사만 탁월한 것이 아니다. 난 <방황하는 칼날>을 영화로 먼저 접했었다. 영화가 주는 장점은 생동감인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간단하게 영화의 생동감을 제압할 만큼 압도적인 생동감을 글자로 구현해낸다. 562p가 되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을 만큼 몰입도가 엄청났다. 머리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범죄 현장 때문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기도 했다.

현실감각에 맞지 않는 법은 때때로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법은 피해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치유해주지 못하고 이것은 개인적인 보복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학교 폭력을 당한 자녀를 위해 사설업체를 고용해 협박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2004년 <방황하는 칼날>이 출판되었는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책에서 던진 물음의 답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내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법률이 정했으니까 참으라고.

도대체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법의 칼날은 가해자를 향하지 않을 수 있으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황하는 칼날로 인해 법을 테두리를 벗어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삶을 살아갈 이유가 생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법을 어기는 것이 잘못된 것인 줄은 알지만, 법을 어겨야만 했던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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