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 책 소개 확인을 했음에도 막상 펼쳐 들고 크게 놀랐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글이라서요. 키워드 나열에 작품의 분위기가 담기기는 어려운 법이지만 아예 정반대 방향으로 착각하기는 쉽지 않은데. 배경 설정 존재감이 워낙 커서인지 가볍고 뻔한 클리셰를 예상했어요. 오만한 알파의 아이를 가진 오메가, 결국 도망을 결심하고. 자신의 오메가가 떠나고 나서야 구구절절 후회하며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알파. 그들의 사랑 이야기. 정말로 뻔하지만 언제 봐도 재밌는, 그런 소소한 내용을 기대했습니다. 쓰고 보니 정말 단단히 오해했네요. 제 예상과 하늘과 땅 차이 즈음 날까요.
1권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작품 내 배경 설정, 세계관을 차곡차곡 설명하고 있어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절망스러웠어요.
오메가의 인권을 다룬 작품은 꽤 되지만 대부분 장르 소설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질 않습니다. 결국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 이야기가 주제이기에 적정선을 넘지는 않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도 그쪽이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 외전에서도 이를 다룹니다.
오메가 삶의 현실은 1권 가득 넘치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처참한 오메가의 인생을 그린 장면들을 꽤 보아왔지만, 이 작품은 제 골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에요.
작품 속 오메가에겐 인권이 없습니다. 알파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마치 애완동물과 비유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유물에 더 가깝습니다. 생명으로 다뤄지지조차 않아요.
의도적으로 백치처럼 길러지다 보니 실제로 작품내 등장하는 오메가는 마치 무지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순진하고 아무것도, 알파에 의해 허용된 정보 외엔 그 어떤 지식도 얻지 못해 본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조차 깨닫지 못하죠. 그들은 지능이 떨어지는 게 아님에도 살아가며 지능을 쓸 기회를 아예 박탈당합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감정만이 살아있는 상태라 부러워하면서도 해코지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이들이죠.
이러한 일률적인 삶에서 툭 삐져나온 것이 바로 주인수 글리입니다. 글리는 오메가 공장에서 자랐어요. 기함이 절로 나오는 표현이죠. 오메가 공장. 어떤 곳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이름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알파를 위한 오메가를 만들어 파는, 말 그대로 공장이죠.
부모의 곁에서 자라는 자연산 오메가(이 기함할 표현 역시 작품 내 오메가의 현실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와 달리 오메가 공장에서 만난 히아신스에게 길러지다, 공장의 주인인 해켓에게 선택됩니다.
그가 어쩌다 도망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서술되지 않아요. 해켓은 그를 특별하다고 표현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콩깍지가 씐 이의 말은 신뢰하기 어렵죠. 글리가 다른 오메가와 특별히 다른 부분이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글리에게는 현실의 부조리를 자각할 기회가 있었고, 사소한 깨달음이 그를 결국 도망치게 했겠죠.
위험하지만 자유로웠던 생활의 끝. 글리는 결국 다시 붙들려옵니다. 그리고 그의 오메가로서의 삶이 다시 한번 시작되죠.
개처럼 목걸이를 걸고 옷을 입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생활. 밥은 식탁 아래 엎드려 주인님이 바닥에 던져주는 고기를 핥아 먹어야 했습니다.
끔찍한 삶임에도 저택의 다른 오메가들은 그를 부러워했어요. 그들에게는 주인님의 손길, 사랑을 받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요.
글리에게 중요한 일은 그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겪었고, 자유를 억압당하며 인권조차 없는 이러한 삶을 끔찍하게 생각했어요. 주인님의 사랑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두려움 또한 알고 있었고, 차마 주인을 거스를 수 없었어요.
병원에서 강제 각인을 받고 주인에게 굴복하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글리는 분노와 증오와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언젠가 주인이 자신을 버리게 될 그 날을 두려워합니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글리. 해켓은 그런 그를 소중하게 다뤄주지 않습니다. 분명 글리를 특별 취급하지만, 그의 방식은 글리를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다정하지만 목적이 있었고 다른 알파들과 달리 오메가인 글리를 특별하게 대하지만 여느 알파처럼 교육하려 했죠.
끔찍한 순간들을 보여주고 겪게 하며 글리를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했어요. 그게 설령 글리의 불안을 이용하는 것일지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글리는 오메가로서의 삶이 주는 괴로움보다 그를 사랑함으로써 얻게 되는 상처가 더 끔찍했어요. 결국,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해켓의 첫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글리.
하루하루가 반항조차 생각하지 못할 시간이 흐르고, 그즈음이 되어선 더는 글리의 정신이 버텨내질 못하게 됩니다. 불안정한 글리를 위해 해켓은 공장 방문을 허락하고, 히아신스와의 만남도 계속 이어가게 해주지만, 글리는 그녀에게서 자신이 진정 두려워하던 미래를 마주합니다.
그리고. 절대 자신을 떠나지만은 말라던, 그럼 뭐든 용서하겠다던 해켓의 말을 뒤로하고 또다시 도망을 시도하지요.
이번 시도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어요. 느긋하게 시기를 계산해가며 여유를 부렸던 해켓이 이번은 초조하게 안달을 냈거든요.
각인. 다시 끌려간 저택에서 글리는 해켓이 자신에게 자연 각인을 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던 그 어느 날이었다면 그 말이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겠지만, 이미 반쯤 정신이 날아가 버린 글리에게 해켓의 각인 사실은 부정적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에 더해 해켓의 과거와 오메가 공장이 생기게 된 이유까지, 오메가인 글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진실을 알게 된 후 글리는 폭발하고 말아요.
과연 두 사람의 사이가 회복될 수 있을까. 관망하는 입장에서조차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될 즈음, 다행스럽게도 해켓이 잘못을 바로잡습니다. 글리 또한 분노를 한 걸음 거둬요. 이대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주인과 소유물 관계를 지워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새로이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로 약속합니다. 글리가 그렇게나 원했던 인간 다운 삶. 애초 살아온 시간이 달랐기에 이해하지 못했던 그 바람을 해켓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해요. 단숨에 변화를 기대하긴 쉽지 않겠지만 그들은 상처받더라도 함께 하기로 합니다.
글리는 알파인 벡터를 낳게 되고, 언젠가는 오메가 딸을 낳고 싶다는 말을 해요. 오메가를 낳을까 봐, 그 아이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까 봐 불안에 떨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식이 결코 그러한 삶을 살지 않도록, 그 아이의 머릿속에는 끔찍한 오메가의 삶이 절대 깃들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는 없어요. 글리와 해켓의 삶에선 차별이나 주종관계가 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이 사는 시대는 여전히 오메가 차별이 존재합니다. 해켓의 영향력으로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었지만 완전한 건 아니었어요.
외전에선 두 사람의 애정 어린 일상과 함께 이러한 현재 진행을 보여줍니다. 앞서 말했듯 무거운 주제가 잠깐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닌 3권을 꽉꽉 채워 다뤄져요.
사전 정보를 조금이나마 알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수가 적은 게 아니다보니 어느 정도는 내용 확인을 하고 시작해야 덜 지칠 것 같아요. 쉬운 내용이 아닐뿐더러 잔혹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페이지와 반복되는 장면들이 꽤 많습니다. 다채롭지 않은 삶, 단순한 취급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내내 고통 속에서 불안정한 글리의 내면을 엿보기란 쉽지 않아요.
하지만 자극적인 설정보다 그로 인한 글리의 감정 변화에 집중해 표현해서, 인물에 몰입해 고통을 나눌지언정 불쾌하지는 않았어요.
가볍게 읽으려던 생각으로 펼쳤는데 어느새 푹 빠져 마지막 장을 넘기네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두 사람, 해켓과 글리 아래에서 자라난 빅터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될 테죠. 알파가 아닌 사람이요. 물론 좋은 사람은 아닐지 모릅니다. 실수한 사람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가차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불합리한 부분에서 차별을 하거나 이유 없이 자신을 우위에 놓고 제멋대로 굴지는 않을 겁니다.
연애 분량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이미 시간이 제법 지난 외전의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그사이의 일들을 짐작하게 해주어 나쁘지 않았어요. 사소하게 삐치고 다투고 화해하며 베타 커플 같다며 좋아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글리의 생을 망쳐버리고 그에게서 다시 돌려주지 못할 것들을 빼앗아버렸다는 해켓. 담담하게 뱉을 뿐이지만 그 어떤 처절한 후회보다 와닿았습니다. 눈치를 살피며 기타 고용인들의 조언까지 얻어가며 글리를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