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스물아홉째 왕자 (외전증보판)
라쉬 / 비하인드 / 2017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사전 정보 전혀 없이 구입한 작품이라 처음 펼쳐 들고 살짝 당황했습니다. 작가님 다른 작품을 본 적 있다 보니 편한 마음으로 읽을 생각으로 구입했는데 배경이 제가 생각한 것과 아주 달랐어요. 곧 작품 설정이 풀려서 어쩌다 우리 왕자님이 이런 처지가 되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씁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제목에서 느낀 이미지는 귀여운 막내 왕자님의 발랄한 일상과 같은 명랑 쾌활한 이야기였는데, 정작 내용은 오히려 정반대에 예상과는 저만치 멀리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홀대받는 왕자님이 최악까지 떨어졌다가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린 글이었어요.

우리 왕자님, 비안카는 제목 그대로 스물아홉째 왕자입니다. 어머니는 일곱 번째 왕비이고, 어머니가 낳은 자식만 해도 셋이에요. 비안카는 그중 둘째이고요. 어릴 적부터 '하지 말아라' 와 함께 건강에 대한 염려를 받으며 자랐지만, 먼저 생을 떠난 건 동생과 어머니였죠.
왕위싸움을 피해 북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좁고 햇빛도 들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시종들의 외면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밥을 굶기는 일쑤고 할 수 있는 건 종일 책을 보는 것밖에 없는 생활. 그런 그를 신경 써주는 사람은 장군 해리 마그너스 에인트 경. 그뿐이었습니다.
얼굴에 큰 흉터를 지닌 에인트경은 왕궁의 기사단입니다. 그의 삶이 시작부터 직함을 가지게 된 건 아니었어요. 에인트경의 삶은 처참했습니다. 비안카의 사연을 적은 뒤 잇기엔 너무나 끔찍한 시간들이었지요. 돈을 주거나 잘 곳을 주거나 혹은 다른 쓸모가 있거나 그것뿐인 삶. 얼굴의 흉터 역시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었죠.
그가 비안카 왕자를 처음 만난 건 산책을 하고 있던 일상 어느 날이었습니다. 말동무를 해줄 수 있는가 왕자의 명령 아닌 명령에 마그너스의 호기심은 이를 수락하게 되죠. 북궁에 박힌 왕자는 마그너스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가벼운 호기심에 시작된 방문은 하루 이틀 계속 이어지고, 마그너스는 북궁의 병력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마그너스의 방문은 잦아졌지만 그를 두려워한 시종들의 방문은 점점 더 줄게 되었죠. 결국, 마그너스는 시종들을 대신해 왕자의 시중까지 맡게 됩니다. 일상을 함께 나눈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게 되고, 비안카 왕자는 또 한 번 명령 아닌 명령을 하게 됩니다. 본궁의 소식을 내게 알려주게. 본궁의 정보를 끌어모은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상한 머리를 써본들 그뿐이었죠. 둘의 일상은 여전했어요.
일상에 변화가 찾아든 건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줄곧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살아온 왕자가 사실 남성 오메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두 사람은 이 사실을 꼭꼭 숨깁니다. 절대 이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자물쇠를 채우듯 마그너스는 비안의 확답을 받아내죠.
비안카가 성년이 되고 그다음 해 반란이 일어납니다. 모든 왕족이 몰살당했어요. 비안카 왕자는 마그너스의 어깨에 매달려 궁을 빠져나갑니다.
누구도 자신이 왕자임을 모르는 곳에서 비안카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본래의 이름 대신 비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흑단 머리칼은 금발이 되지요.
웬티에서의 삶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결코 쉽지도 않았습니다. 오메가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발정기가 비안을 괴롭혔기 때문이었죠. 마그너스가 전해주는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에게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옵니다. 반란군, 이제는 왕국군이 된 카옌의 눈에 띄게 된 것이죠. 비안의 어느 부분에 관심이 갔던 것인지 카옌은 계속해서 비안을 찾습니다.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비안, 그리고 결국 약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 마그너스. 약이 없는 발정기, 오메가와 알파. 그들의 처음으로 함께 몸을 섞게 됩니다.
마그너스가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해 그를 믿고 의지하게 된 비안과 그런 비안에게 자꾸만 소유욕이 일어 혼란스러운 마그너스. 두 사람 사이의 일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상황은 더 나쁜 길로 흐르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비안에게 적정선의 관심만을 주었던 카옌이 하필 발정기에 웬티를 방문하합니다. 설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오메가의 냄새를 그가 알까, 절반의 운에 맡기며 문을 열고만 비안. 순식간에 알파의 향에 점령당하고 맙니다.
본능에 몸을 맡겨 버린 시간. 아름다운 카옌의 몸을 누구보다 원하게 된 비안은 절망하지만, 결코 저항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카옌을 원하고 있음을 구걸하죠. 비안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카옌. 둘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집니다. 비안이 버려진 오메가라고 생각해 왕궁의 일을 떠벌이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죠. 마그너스가 비안에게 소유욕을 느낀다면 카옌은 가학심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그에게 휘둘리면서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날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몸에 비안은 분노를 느낍니다. 난생처음 증오를 느끼죠.
설상가상으로 비안이 머리카락 색을 위장했음을 카옌이 알아채게 되고, 비안의 불안은 더 커집니다.
비안은 마그너스가 연결해준 세력과 정보를 통하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카옌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불안은 계속됩니다.
결국. 카옌에게 왕실 핏줄의 증거와도 같은 청옥 티아라를 들켜버리게 되고, 비안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끌려갑니다.
이보다 더 최악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순간 그를 도우러 온 혁명군에 의해 비안은 구출돼요. 어둠에 몸을 숨겨 오랜 시간 기회를 옅봤던 혁명군은 철저하게 계획한 대로 반란군을 진압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안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이반 왕국의 후손 비안카는 자신을 농락하고 휘두른 카옌을 참수하고 마그너스를 왕의 기사로 임명합니다.

시작의 음울한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어서인지 그들의 헤쳐온 과정이 혹독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비안이 오메가로서 거부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혹은 자신의 소유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마그너스의 절망을 체감할 때. 주인공들에 몰입해 따라가다 보면 감정이 널을 뛰었고 마냥 신나서 볼 수는 없는 글이었지만 그런데도 흐름을 따르는 것이 즐거웠어요.
왕권과 먼 스물아홉째 왕자로 태어나 반란으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모두 잃고, 창기들 틈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죽음의 순간까지 다다랐다가 결국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비안카 스트라스 엘리움 레이반, 그의 생을 그린 이야기.

스물아홉째 왕자는 짧지만 강렬한 글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몰입해 읽어내렸어요. 해당 장르에 집중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건과 설정을 적절하게 잘 배합해 여러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외전은 짧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었고, 아쉬웠던 본편을 충분히 달래주었어요. 마그너스에게만큼은 맹인 같이 스스로가 어설프다는 비안카. 이성을 잃어 네 아이를 갖고 싶다고 조르는 비안의 곁에서 말없이 품을 내어주는 마그너스.
왕국에 안정이 깃들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습니다.
험난한 과정을 지나 서로를 안고 잠드는 두 사람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이제는 녹색 비늘뱀으로 변한 카옌에게 쫓기는 꿈도, 커다란 불이 덮치는 꿈도, 더는 그를 괴롭히지 못할테죠.
격렬하면서도 잠잠하게 이어진 두 사람의 감정이 제 일상마저 뒤흔드네요. 한동안 여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