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 스투디움 총서 3
임춘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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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재현의 중국 근현대문학사 쓰기의 새로움과 낡음(문화/과학74, 375-386)에 대한 답글이다.

 

 

 

1. 외래어 표기 또는 용어 문제

 

외래어 표기법은 문제적이다.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학회나 출판사나 나름의 표기법을 만들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국가기관이 주도한 사회적 합의로 보고, 특정 단체에서 그것을 문제적이라 생각한다면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것을 무망하다 여기고 자신만의 합의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의 문제점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립국어원은 그 문제를 개방적으로 검토해 새로운() 표기법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그 표기를 재고해야 할 것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를테면 서구라는 표기가 대표적이다. ‘서구(西歐)’서구라파(西歐羅巴)’의 약칭으로, ‘‘Western’을 의역한 것이고, ‘구라파유럽(Europe)’을 음역하여 歐羅巴(Ouluoba: 어우뤄바)’로 표기한 것이다. ‘유럽어우뤄바의 음가가 얼마나 근접한 것인지와 무관하게, 중국인들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약속했고 그래서 상호 의미 전달에 지장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한자만 들여와 우리식 한자음으로 독음하고 있다. 우리는 자의적 약속이 아니라 추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 서구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고 싶지 않을 것이지만, 너도나도 서구라고 쓰는데 나 혼자 굳이 서유럽이라고 쓰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통념의 힘이고 소통의 정치학일 것이다. 서양 각국의 이름도 비슷한 경로로 우리에게 수입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英格蘭(Yinggelan: 잉거란)이라는 나라를 줄여 英國으로 표기하고, 미국은 美利堅(Meilijian: 메이리젠)이라는 나라를 줄여 미국으로 표기했다. 우리는 그것을 몰주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아시아 담론을 운위하고 세계문학과 소통하려 한다면 동아시아에서 소통할 수 있는 대응 기표를 찾고 나아가 세계문학과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경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modernnation의 번역어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미리 전제할 것은 아래의 검토가 통합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 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1-1.modern: 현대와 셴다이

 

박사과정에 입학해 뒤늦게 중국현대문학으로 전업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명제에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혁명 시기(1919-1949)의 문학을 지칭했던 이른바 셴다이(現代)문학은 한자 기표의 동일함을 근거로 우리에게 현대문학으로 수용되었다. nation을 민조꾸(民族)로 번역한 일본식 표기를 한자 독음으로 수용한 것처럼 말이다. 民族민조꾸/민족으로 각기 표기되어도 그 기의가 같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現代의 경우는 중국의 셴다이와 한국의 현대라는 표기가 지칭하는 기의가 다르기 때문에 기표도 달리 표기하는 것이 좋다. 중국 셴다이문학이 종결된 시점(1949)에 한국 현대문학이 시작(1948)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박사논문을 완성할 무렵이었고, 그래서 1917-1949년의 대중화론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 제목에 전기라는 용어를 사용해 1949년 이후와 변별했다. 한국에서 근대와 현대의 구분이 모호했던 반면, 중국은 진다이(近代. 아편전쟁 이후)셴다이당다이(1949년 이후)의 이른바 삼분법‘20세기 중국문학론이 제기되기까지는 견지되고 있었다. 대학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중문학부(中文系) 내에 셴다이문학 교연실(敎硏室-전공에 해당)과 당다이문학 교연실이 나뉘어 있고 베이징대학 대학원의 경우는 지금도 신입생을 교연실 별로 모집하고 있다. ‘20세기 중국문학론은 혁명 이전 단계와 이후 단계를 구분하려는 셴다이와 당다이의 장벽을 타파하고 그것을 하나의 유기적 총체로 봐야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면 진다이는? 이는 구민주주의 혁명시기이기에 20세기 중국문학론에서도 그 일부만 용납했을 뿐 전체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현대적(modern)’이므로, 그것이 인지 인지를 변별하는 것은 정치논리에 불과하다. 사실 삼분법 자체가 혁명사 시기구분의 외연인 만큼,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려는 나의 시도가 중국 근현대문학’(1997)이라는 기표로 표현됐고, 이를 확장한 것이 동아시아 근현대’(2008)라는 기표였다. 이것은 근대와 현대 또는 진다이와 셴다이 그리고 당다이를 단순 통합한 것이 아니라, ‘서유럽 모던의 대응 개념으로 내발적/외발적 요인에 의해 시작된 동아시아의 새로운 단계를 지칭하기 위함이었다. 이 가설적 개념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리쩌허우(李澤厚)近現代라는 용법을 참조했기 때문이었다.

리쩌허우는 그의 주저인 사상사론시리즈에서 古代近代 그리고 現代를 다루면서 當代라는 별책을 내지는 않았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當代를 별도로 다룰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當代를 독립 시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중국현대사상사론의 내용 대부분이 이른바 셴다이에 국한된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 중국문예 일별같은 글은 그 범위를 20세기 전체로 확장하고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도처에서 近現代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진셴다이는 이 글의 근현대와 내포와 외연을 같이 하는 개념이다. 그는 진다이셴다이를 별책으로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진다이셴다이를 하나로 묶어 진셴다이(近現代)’라 칭하면서 그에 대한 시기구분을 시도했다. 미리 알아둘 것은 그의 시기구분이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관점과 대상에 따라 유연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근대사상사론에서 세 차례 시대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1) 이를테면 중국 전체의 근현대를 (1) 18401895, (2) 18951911, (3) 19111949, (4) 19491976, (5) 1976 이후의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2) 또 중국 근현대 지식인의 세대구분을 시도하는데, (1) 신해 세대, (2) 54 세대, (3) 대혁명 세대, (4) ‘삼팔식세대에다가 (5) 해방 세대(1940년대 후기와 1950년대)(6) 문화대혁명 홍위병 세대를 더하면 중국 혁명의 여섯 세대 지식인이다. 그리고 (7) 7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 시기일 것이라 했다.

3) 신해혁명이 실패한 후 지식인의 세대구분을 세밀하게 했다. (1) 계몽의 1920년대(191927), (2) 격동의 1930년대(192737), (3) 전투의 1940년대(193749), (4) 환락의 1950년대(194957), (5) 고난의 1960년대(195769), (6) 스산한 1970년대(196976), (7) 소생의 1980년대, (8) 위기의 1990년대. 이는 10년 단위로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좋아하는 중국인의 문화심리구조를 염두에 둔 개괄로 보인다.

4) 20세기 중국(대륙)문예 일별에서는 지식인의 심태(心態) 변이(變異)’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전환의 예고(1898 戊戌1911 辛亥), (2) 개방된 영혼(19191925), (3) 모델의 창조(19251937), (4) 농촌으로 들어가기(19371949), (5) 모델의 수용(19491976), (6) 다원적 지향(1976년 이후).

이런 맥락에서 중국 근현대는 아편전쟁 전후 어느 시점에 시작해 지금까지의 시기를 유기적 총체로 보자는 것이고, 이전 단계의 삼분법 또는 사분법의 단절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중국 근현대 장기지속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1-2. 네이션/국족과 에스닉/민족

 

nationethnic을 발음대로 네이션에스닉으로 표기하는 것이 한 노선이고, 그것을 가능한 한글로 번역하자는 것은 또 다른 노선이다. 전자를 외국화(foreignization)’라 한다면 후자를 자국화(domestication)’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장점은 개방적이다. 굳이 우리 어휘에 없는 단어를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번역하는 것보다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치즈, 커피, 초콜릿 등은 이제 한글을 풍부하게 해주는 단어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초기에는 구구한 해설이 필요하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라디오나 피자처럼 아무도 그것이 뭔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 도달할 것이다. 반면 외국화를 들이대기로 간주하고 그보다는 길들이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국화론자들은 출발어(source language)에 해당하는 도착어(target language)를 최대한 자국어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들은 nation을 처음 접했을 때 民族(민조꾸/민쭈/민족)을 선택했지만, nationstate와 긴밀한 관계(nation-state)에 있음을 새로이 인지하곤 民族이라는 도착어보다는 궈쭈(國族, 타이완), 음역(일본), 국민(한국) 등으로 바꿔 표기하고 있다. 나는 궈쭈라는 기표에 동의하면서 그것의 한자 독음 표기인 국족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현대와 셴다이의 기의가 달라지는 것과는 변별되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거나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에스닉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범주에 국한해 이를 네이션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민족을 번역어로 선택했다.

 

1-3. 김용과 왕안이

 

모택동과 등소평은 그래도 익숙하지만 호금도와 습근평은 그렇지 않다. 익숙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중매체로 귀결된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대중매체에 길들여지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모택동 하면 그렇게 인식하고 시진핑 하면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영웅문이 유행하던 1980-90년대에 중국인명의 원발음을 존중하자고 생각한 대중매체가 있었는가? 김용이란 기표는 그렇게 한국에서 소통되었고 나는 그것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상호성의 원칙이라는 것도 있고 소통의 정치학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는 것이 세상에 유일한 고유명사의 원래 발음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내가 린춘청으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것처럼(그렇다고 중국 친구들이 그렇게 부를 때 모른 채 할 수는 없다) 왕샤오밍(WANG Xiaoming)도 왕효명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표는 자의적인 만큼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습근평으로 표기하든 시진핑으로 표기하든 그 기의가 동일하다면 굳이 어느 한쪽을 우길 필요 없다 이는 시비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나 한국의 현대와 중국의 셴다이는 한자 표기가 같을 뿐 기의가 다르다. 그러므로 양자의 표기를 변별해주어야 한다. 무협소설 주인공들의 이름표기를 고민하다가 고대 인명은 한글 독음으로 읽는다는 원칙을 적용했는데, 거란인 蕭峰을 거란어 발음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은 백 번 타당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않은 것은 그 접근이 쉽지 않거나 게으름(이재현의 표현에 따르면 귀차니즘)의 증거다.

 

2. 20세기 중국문학과 두 날개 문학

 

첸리췬 등의 ‘20세기 중국문학과 판보췬의 두 날개 문학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그 허점을 파헤치는 이재현의 필봉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괴테가 중국의 전기(傳奇) 작품의 프랑스 번역본을 읽은 후 세계문학 개념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황쯔핑천핑위안첸리췬의 추정에서 전형적인 내셔널리즘/국족주의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날카롭고, 그들이 언급한 풍월호구전과 그보다 뒤에 번역된 화전기옥교리등의 재자가인 소설에 대한 언급도 치밀하다. 사실 괴테에게는 중국문학 이전에 페르시아문학의 세례가 있었다. 칠순을 바라보던 괴테가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독일어 번역본을 받아 읽고 느낀 시적 감흥에 자극 받아 쓴 239편의 시들을 12개의 주제로 나누어 연작시 형태로 묶은 시집인 서동시집, ‘중국-독일식 하루와 일 년의 시간’(Chinesisch- Deutsche Jahres und Tageszeit)라는 제목 아래 14편의 연작시로 결실을 맺은 시기보다 14년 앞선다. 그러므로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을 중국문학에만 연결시키는 첸리췬 등의 논술은 분명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중국문학 담론은 발표된 지 30년 가까운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문제가 많다. 이재현이 지적한 것과 내가 비판한 것개방형 총체를 지향했음에도 중국 내에 국한, 연구와 교학 사이의 괴리, 지식인 중심의 계몽에 초점외에도 서양중심론의 영향, 충분치 않은 모더니제이션 등의 비판이 있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중국문학 담론이 제기된 맥락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문학사와 현대사 연구 속에서 毛澤東신민주주의론모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었다는 첸리췬의 고백은, 20세기 대륙을 지배했던 마오쩌둥 문화의 산물임을 자인하는 민간 이단사상 연구자의 언급이기에, 충분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부언하면, 1989톈안먼 사건그리고 1992남방 순시 연설이후의 중국을 일당전제-정 국가로 파악하고 있는 첸리췬은 이른바 덩샤오핑의 ‘64체제가 마오쩌둥의 ‘57체제를 계승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마오쩌둥 사후 그에 대한 과학적 비판의 부재가 톈안먼 사건으로 귀결되었기에 뒤늦게라도 어떻게 마오로부터 빠져나올 것인가?”를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이는 첸리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오쩌둥 사상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마오쩌둥 문화는 전통 중국 밖에 존재하는,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로, 이는 중국 대륙의 새로운 국민성을 형성케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지식계는 그 과제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첸리췬의 이런 평가를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국문학사 담론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54 이후 신문학에 의해 타도되고 문학사에서 지워졌던 통속문학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중국근현대문학사에 복권된 것은 실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물론 지금도 모든 논자들이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재현이 거론한 린자오(林昭)의 혈서라든가 구준(顧准)의 일기 등은, 린줴민(林覺民)아내에게 보는 편지나 루쉰의 양지서등을 문학사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문학사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수민족의 작품도 빼놓을 수 없고 일제 강점기 타이완 작가인 양쿠이(楊逵)의 일본어 작품도 다 비석을 세워줘야 할 대상들이다. 다만 담론의 속성상 과정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게 새로운 문학사를 쓰라면 이재현의 권고를 받아들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중국근현대문학사를 새롭게 쓰려는 의지가 없고 그보다는 더 생기발랄한 주제와 텍스트로 나가려 한다.

 

3. 學而思

 

논어』「위정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무척 익숙하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하되 사()하지 않으면 어둡고, ()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쯤으로 직역할 수 있는 이 구절은 역대로 를 독서와 사고로 이해하고 양자를 겸비할 것을 권하는 문구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실천적 지식인 신영복은 오랜 한학 공부를 바탕으로 독특한 해석(interpretation)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학과 사를 대()로 보아 학은 배움(learning)이나 이론적 탐구로 보되,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思索)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실천 또는 경험적 사고로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관행적 해석인 관념적 사고와 다르다.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내 공부는 여전히 학()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학이불사를 경계하며 임춘성 나름의 목소리를 내라는 이재현의 충고는 뼈저리다. 이런 요구가 사이불학으로 나가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부를 일단락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픈 열망가운데 독서와 사고 또는 이론적 탐구와 실천/경험적 사고의 변증법적 절합인 학이사(學而思)’의 경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다. 관건은 어느 한쪽으로 환원시켜서도 안 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이재현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신랄하고 비유는 현란하고 대담하다. 글 전체를 무림대회로 비유하면서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를 정파로, 문화연구를 사파로 설정하기도 했고, 관례적인 서평을 드립질로 조소하는가 하면, 중국 근현대문학이 수십 개의 촉수를 지닌 에어리언이나 여러 개의 목을 가진 히드라로 표상되어야 한다는 표현은 은연중 중국(문학)을 괴물에 비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는 예전에 세계문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영문학과 중문학을 타파해야 한다는 조동일의 주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미는 두터운 비평적 실천버려진 낡은 묘지터에서 묘비명도 없이 묻힌 작품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조심스레 이장하거나 안장하는 행위, 이는 무당-연구자의 목소리와 죽은 저자-텍스트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게 되는 것이라는 비유다. 이는 왕년에 이름을 날리던 민중문학 진영의 평론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느낌을 준다. 요즘 저술에 몰두하면서 여전히 ---을 넘나들며 수작을 벌이는 그가 최근 중국에 필이 꽂혀 관련 서평도 자원해서 쓰고 여러 가지 비평적 잡문을 쏟아내는 것은 펑유입장에서도 중국학 전공자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왕년의 왕성한 필력을 지면에서 자주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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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 스투디움 총서 3
임춘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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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문학사 쓰기의 새로움과 낡음

 

 

1. 임춘성은 내게 '펑요''따거'이자 '쉬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의 서평 관례를 깨뜨리고자 한다. 서평이란 이름 아래 지루하게 책을 요약하고나서는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눈꼽만큼의 비평, , 이미 '빨아준' 범죄에 대한 알리바이를 어설프게 덧붙이는 식의 드립질은 하지 않으려 한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임춘성 스스로가 책머리에 붙인 간결한 설명과 인터넷 쇼핑몰에 떠있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자잘한 것부터 트집 잡아 보자. 임춘성은 근대, 현대, 당대라는 말 대신 셴다이, 진다이, 당다이란 말을 쓴다. 왜 그랬는지가 이 책에서 속시원하게 밝혀 있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아마도, 중국 대륙에서 통용되던 삼분법, 그러니까 근대는 아편전쟁 이후, 현대는 5.4운동 이후, 당대는 1949년 이후를 가리키는 바의 홍색-파쇼적 용례를 임춘성 스스로가 지향하는 바의 '동아시아 근현대'와 비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책값이 115위안이 넘으니까 독자에 대한 서비스로서는 형편없는 셈이다. 반면에 'post-socialism''后社会主义''hòushèhuìzhǔyì'에 상응하는 한글 표기가 아니라 '포스트사회주의'로 표기된다. 아마도, 무엇보다 '포스트'에 담긴 여러가지 뜻을 죄다 살리기 위함일 텐데 암튼 '셴다이' 등과는 대조가 된다.

이 책은 첫 글 "120세기 중국문학과 두 날개 문학"이 제일 중요하다. 원래 논문의 제목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의 정치학"에서 이 책 제목 <중국 근현대 문학사 담론과 타자화>가 나온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그 담론들을 아주 계몽적으로 잘 요약, 소개하고 있다. 임춘성의 입장은 뒤 부록에서 번역한 황쯔핑 등의 담론과 판보췬의 담론 등이 그 이전의 다른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들에 비해서 타자를 억압, 배제, 침묵시키는 바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했다는 것이다. 임춘성은 이런 맥락에서 '센다이' 등의 기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국족(國族)' '국족주의' 등도 너무 거슬린다. '셴다이' 식이라면 '국족''궈쭈'가 되었어야 했다. '국족'이란 말은 국민국가와의 연관 때문에, 그리고 손문 이래 중국에서의 용법을 감안해서 쓰고자 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내 생각에는 네이션, 내셔널리즘 등이 더 낫을 것 같다. 아니면, 맥락에 따라서, 국민이나 민족 등으로 나누어 쓰거나 말이다. 아무튼, 국가를 갖지 못한 네이션이 지구상에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네이션과 에스닉의 차이라는 것도 임춘성이 즐겨쓰는 바의 타자화라는 역사적-정치적 과정의 결과로서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지 무엇인가 그 자체로 실체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사람 이름의 표기도 헷갈린다. 무협소설가 김용은 진융으로, 영화 감독 왕가위는 웡카와이로 표기되어 있다. 대륙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아니라 광동어 발음을(김용의 경우), 또는 더 나아가서 본인이 원하는 영어식 표기를(왕가위의 경우) 한글로 적어낸 것이라고 짐작된다. 레이 초우(周蕾)는 홍콩 출신 아시아계 미국인이어서 그런 순서인 거고, 얼마 전 서거한 렁핑콴(梁秉鈞)은 아마도 웡카와이식 표기인 듯하다. 이 점에서 임춘성의 원칙은 분명하고 일관되어 있다. 중국 사람 이름이라고 해서 모조리 대륙의 보통화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궈쭈적-언어적 폭력일테니까.

그렇지만, 소설 <장한가> 주인공 이름은 '왕치야오'인데, <천룡팔부> 주인공들의 이름은 '소봉' '단예' '허죽'으로 표기되어 있다. 소설에서 '교봉'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소봉'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왕가위/웡카와이식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蕭峰'의 올바른 표기는 '소봉'도 아니고 'Xiāofēng'에 상응하는 한국어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를 계속 밀고나간다면, 이제 蕭峰, 적어도 임춘성의 책 안에서는, 몽골어에 가깝다고 추정되고 있는 거란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해야 맞을 것이다. 진융이야 제 소설 안에서 蕭峰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의 이름의 경우, 내게, '왕안이''왕안억'보다 친숙한 것은 분명하다. 왕안이라는 소리 기표가 王安憶이라는 문자 기표보다 먼저 와서 내가 그것에 내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의 경우는 다르다. 내게, 모택동이 마오쩌둥과 엇비슷하거나 혹은 약간 더 우세한 것과도 엄청 다르다. 임춘성의 책을 보기 전까지, 나는 진융이란 기표를 귀나 눈으로 접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어쨌거나, 임춘성은 이 점에서 나름의 분명한 원칙과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중국 문학사 담론과 관련된 임춘성의 기표적 민감성은 여전히 낯설고 껄끄럽다. 저자 스스로도 무협소설 주인공의 이름 표기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했듯이, 고유명사나 통용되는 개념의 관례적인 표기는 그 나름대로 존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 문제는 따지기로 치면 밑도 끝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2. 이 책 뒤에는 부록으로 중국 근현대문학사론 관련 논문이 두 편 번역되어 있다. 황쯔핑 등의 것과 판보췬의 것이다. 둘 다 중국 근현대문학사에 관한 이론적 성격의 글들이다. 전자(1985)는 소위 삼분법을 넘어서서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제출하고 있고, 후자(2007)"통속문학과 두 날개문학"이라는 번안된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이 두 논문은 중국 근현대문학사에 관한, 임춘성의 주장과 입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제시된 것이다.

이제 이것들에 시비를 걸어서 2:1, 혹은 4:1로 붙어보자. 물론, 이 싸움의 책임이, 엄밀히 따져서 임춘성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황쯔핑 등의 글은 앞부분에서 '세계문학'을 언급하는 데서 짜증이 확 나버렸다. 황씨 등은 괴테와 <공산당선언>을 인용하면서 세계문학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문학이 초보적으로 형성된 시대가 20세기, 혹은 그 상한선이 19세기 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1980년대 초반 문학운동의 기억에 기대서 내뱉는 한에서, 이들의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은, 시인 고은 등이 최근 몇 년 동안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 나라 안팎에서 벌여온 추잡한 앵벌이짓만큼이나 아주 웃긴 것이고, , 왕쯔핑들 스스로 괴테와 <공산당선언>에 기대는 한, 그 시기 획정도 틀린 얘기다. 이들의 세계문학 개념도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특히 내 뚜껑이 확 열려버린 까닭은, 황씨 등이 그 시기와 관련해서, 괴테 얘기를 꺼내면서 각주에서 소위 세계문학의 개념은 "괴테가 중국 전기(傳寄)--아마도 <風月好逑傳>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은 후 형성된 생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17) 스치듯 덧붙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짱꼴라 문발이'들의 내셔널리즘이 은근히/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소위 세계문학이라는 '장궤(掌櫃)'에서 고작 꺼내든 게 바로 괴테에 의지한 바의 자기네 고전, 그것도 고작 <풍월호구전>이라니. 그러니까, 내 말은 "<금병매><홍루몽>이라면 몰라도"라는 얘기다. 이 둘은 나도 들었다가 놔 보기는 여러 번 했으니까.

에커만과 나눈 대화(1827.1.31)에서 괴테가 세계문학을 언급한 대목에서 중국 작품을 예로 든 것은 사실이고, 괴테가 일정하게 상당한 중국 취향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괴테가 소위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바로 그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은 단지 '짱깨' 안에 든 것 말고도 꾸란이라든가 페르시아의 고전 시라든가 여러 비유럽 텍스트들 모두를 통해서다. 괴테가 거기서 <겐지노모노가타리>를 언급했으면 어쩔뻔 했냐, 너희들은.

괴테가 세계문학을 말하면서 예로 든 작품이 과연 <호구전>인지 아닌지는 현재 내 수준에서는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다. 어쨌든 간에, 어떤 이는 그게 <화전기(花箋記)>라고 하고 어떤 이는 <옥교리(玉嬌梨)>라고 하고 있다. 아무튼, 유럽에서 <호구전>1766년에, <화전기>1824년에, <옥교리>1826년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셋 모두, 보통사람은 겪기 어려운 기묘한 애정 관계를 다룬, 명말청초의 소위 재자가인 소설이다. 아마도 이 소설들은 18세기에서 19세기 초에 광동 지역에 접근한 유럽인들(처음에 온 사람들은 아마도 상인들)에 의해서 유럽으로 전파된 듯하다.

물론 나는 이 셋 모두 읽어보지를 못해서 그것들이 <금병매>보다 문학적으로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홍루몽>보다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제재와 그 제재를 다루는 태도라는 점에서 이 재자가인 애정소설들이 <금병매><홍루몽>이 이루는 커다란 서사 사이클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또한, <홍루몽>의 갑술본 초본이 간행된 것은 <호구전>이 유럽에서 간행된 1766년보다 이전이었으므로, <호구전>과 비교할 때, <홍루몽>이 유럽에 더 먼저 전해질 수 있었던 형식적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씨 등은 '아마도'라는 부사로 한정하기는 했지만, <화전기><옥교리>보다는 훨씬 앞서서 유럽에 소개된 <호구전>을 예로 들고 있다. 경박한 내 머리로는 황씨 등의 의도가 아주 금방 쉽게 이해된다. 그들은 중국문학사의 작품이 유럽에 전래되어 그것이 괴테에게 영향을 미친 시기를 가능한 한 앞당기고 싶은 것이다. 세계문학의 형성 시기를 늦추고 싶었듯이.

그러나, 괴테가 세계문학을 말할 때 정작 마음 속에서 간절히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유럽문학'이라고 나는 감 잡고 있다. 그런데, 그 유럽문학이라는 것은, 그리스나 라틴의 고전문학이나 괴테의 동시대 직전까지 프랑스문학이 지녔던 문화적 헤게모니가 주는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서 바야흐로 독일문학을 승격, 포섭시키려고 했던 한에서의 바로 그 유럽문학인 것이고, 이 과정에서 비유럽의 여러 텍스트들은 단지 조연이나 엑스트라 수준에서 등장한 것이라는 게 내 '통박'이다.

특히, 유럽에 번역된 <화전기>에는, 설화 등에서 전래된 여러 전설적 미인들의 목각판화 카탈로그인 <백미신영(百美新詠)>이 도판 이미지는 빼고 글 부분만 번역되어 부록으로 달려 있다. 또 바로 그 뒤에는 청나라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그리고 중앙 부서의 재정에 관한 사항이 부록으로 달려 있다. , 여자와 돈이라니!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에게는 이게 오리엔탈리즘 판타지의 전부가 아니던가(http://archive.org/details/chinesecourtshi00thomgoog).

아무튼 이 중국 미인들 얘기에서 푹 빠졌던 괴테가 시 몇 편을 짓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이 얘긴 중국에서 1930년대 초에 이미 알려졌다. 임춘성 책의 독자들이라면, 이 시들이 로맨티시즘/에로티시즘과 오리엔탈리즘이 전형적으로 결합한 소산이라는 것을 굳이 사족으로 달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판보췬 얘기도 별로 어려울 건 없다. 다만, 내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은 왜 소위 통속'문학' 작품들만이 중국 근현대문학 안에 들어가야 하는가다. 양달(楊達)이 일본어로 쓴 작품은 왜 중국 근현대문학사 안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가? 임소(林昭)의 혈서는 왜 문학 작품이 아닌가? 고준(顧准)의 일기는 왜 중국 근현대 문학의 날개가 될 수 없는가? 푼왕(Phuntsok Wangyal, 平措汪杰)의 자서전은 왜 또다른 날개가 되지 못하는가? 결국 이러한, 한국 80년대식의 프로메테우스적 물음에 제대로 답하고자 한다면 중국 근현대문학은 두 날개로 나는 새가 아니라 수십 개의 촉수를 지닌 에어리언이나 여러 개의 목을 가진 히드라로 표상되어야 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점이나 오리엔탈리즘의 비판이라는 입장에서 냉정하게 본다면, 결국 괴테의 세계문학 논의에서 중국문학 작품이 부차적으로 끼어들어가는 것이 정작 중국문학 입장에서는 자랑할 일은 결코 아니다. 아무튼, 그 이전까지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자국 문학을 소위 세계문학 안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괴테가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황씨 등은 중국문학에 대해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임춘성 책의 미덕이 드러나는 셈인데, 임춘성은 바로 황씨 등의 이러한 프로젝트에서 타자화되고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3. 차 여러 잔 마실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제 임춘성과의 보스전을 치뤄야 한다. 사실, 이건 자신 없는 분야다. 내가 익힌 무공이래봤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은 능파미보(凌波微步)와 동귀어진뿐이기 때문이다. 동귀어진은 엄밀히 말해서 무공이랄순 없는 일종의 전술인 거고, 능파미보도 구결로만 알고 있는데다가 얼마 전에 생긴 오른쪽 아킬레스 건 염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저자와 독자가 겨룰 때 결국에는 독자가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면, 어느 책이든 독자는 읽어나가면서 그 전에는 전혀 몰랐던 외공들을 두루 익힐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독자야말로 흡성대법(吸星大法)의 대가인데, 바로 그 흡성대법으로 저자 평생의 내공을 죄다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는 저작이나 집필보다 즐겁고 쾌락적이다. 읽기가 쓰기보다 더 좋고 낫다.

임춘성이 잘 쓰는 비평적 용어로 '두꺼운 텍스트'라는 게 있다. 그는 김용 소설들과 왕안이의 <장한가>의 분석에서 이 개념을 쓰고 있다. 그는 미국 인류학자 기어츠로부터 이 개념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임춘성이 밝히는 사문 내력에 의하면, 임춘성의 사조, 그러니까 기어츠의 사부는 철학자 길버트 라일이라는 것이다. 기어츠는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란 개념을 라일로부터 빌어 왔고, 임춘성 자신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텍스트를 '두꺼운 텍스트'로 상정하고, 그런 텍스트가 가지는 문화적 함의를 '문화적 두꺼움'으로 명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253). "그렇다면" 하고나서, 나는 속으로 외친다. "쫄지마, 별 거 아냐"

'두꺼운 기술'이란 개념은 영미의 1960년대 분석철학이나 1970년대의 인류학과 같이, 그 전까지는 아주 팍팍하고 삭막한 행동주의적-실증주의적 동네, 그러니까 산해관 바깥에서야 그럴듯하게 통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복합적인 의미연관 혹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맥락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구라파'(임춘성이 싫어하는 바 동방불패류의 바늘이닷!)에 있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철학 분야에서는 해석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이해의 사회학'쪽에서 많이 했던 얘기다. 또 외국문학 연구 쪽에서는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되, 중원의 문학(비평)판에서는 아주 흔하게 떠돌던 식상한 얘기다. 이런 당연하고도 초보적인 무공을 상대가 여러 번 되풀이해서 자주 쓸수록 초식 대결은 더 편하다. 뒷짐 지고도 다 막아낼 수 있으니까.

물론 임춘성의 사부가 기어츠 하나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강호 무림과 서역 등의 변방 에서 임춘성은 온갖 기연을 겪고 기인을 만났다. 그 중에는 포모파의 고수들, 포콜파의 고수들, 그리고 동아시아 담론파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굳이 사제지간의 법도와 예 없이도 춘성에게 무공을 전수했다. 춘성은 '타자화' 비판이라는 무공을 포모파의 복가(米歇尔·福柯) 선사에게 배웠다. 중국 근현대사상사파(개방파?)의 개조 이택후는 실용이성이라는 무공을 동파육 한 접시와 바꿔서 춘성에게 가르쳤다. 실용이성은 남을 쉽게 이기기도 힘들지만 남들에게 쉽게 지지도 않는 그런 무공이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바둑 기사들의 공통된 기풍처럼 말이다.

두꺼운 기술이라는 무공이 별 거 아님에도 불구하고 춘성이 크게 다치지 않고 강호를 떠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실전에서 여러 고수에게서 배운 다른 무공들을 섞어 썼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 춘성의 기골이 장대한 데다가(그의 장딴지 굵기를 보라!), 십 몇 년 전에 김용 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임독 양맥이 트인 뒤로는 누구와 대련하더라도 싸우면서 바로 그 사람의 무공을 조금씩 훔쳐배워서 두루 쓰는 바의 재주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임춘성이 사귄 고수들 중에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문파인 포사파에 속한 이들이 있다. 포사의 정식 명칭은 포스트사회주의다. 포사파는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중국 대륙이 대놓고 자본주의로 회귀, 전환하면서 생겨난 문파인데, 원래 이 문파는 '신시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신시기 문학이란 말이 굉장히 엉성하고 애매하기 때문에 문파 이름을 바꾼 것이고 그 뒤로 크게 문파의 세를 떨친 것이다. 포사파의 무공은 '독고구검' 같은 것이어서 본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자본주의로 회귀, 전환해버린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정해진 초식 없이 모든 유형의 초식을 이기는 것이다. 임춘성은 포사파의 무공 심결을 바탕으로 해서 포모파, 포콜파, 동아시아 담론파,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파의 무공을 종합해서는 중국 근현대문학사 새로 쓰기를 평정하려고 하는 바의 원대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 평정의 한 시도가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라는 정파와 문화연구라는 사파를 아우르면서 개최한 무림대회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무림대회에 독자-구경꾼으로서 참석한 셈이다. 나로서는 각주나 참고문헌의 무림첩에 나와 있는 이름들과 비급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게 많았다. 인명 색인에 나와 있는, 초청된 무림 인물들 숫자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13과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무림대회에서 매번 임춘성은 위명이 쟁쟁한 무협들과 각 문파의 장문인급 고수들로 하여금 서로 초식 대결을 시키고난 다음에야 자기 무공을 슬쩍 펼쳐보인다.

무림대회의 회주답게 임춘성은 초청된 세계적인 무협들을 독자들에게 잘 소개해준다. 무협들의 이름과 그들의 무림비급, 그리고 무협들의 주요 내력과 은원관계와 무공의 핵심 비결을 간결하게 잘 정리해주고 있다. 이번 무림대회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다. 예컨대, 황씨 등이 '20세기 중국문학' 개념을 내세우면서 그 기점을 1898(무술!변법)으로 내세웠다는 것, 또 판씨가 "고대문학의 노선에서 근현대문학의 노선을 환승하는 지점"이 바로 <해상화열전>(1892)라고 주장한다는 것 등이다.

정파 쪽에서는 무명소졸이지만 녹림 쪽에서는 좀 놀던 나로서는 의심스러운 게 하나 있다. 과연 회주 임춘성은 과연 과두문자로 된 비급 <해상화열전>을 읽어보기는 했는지. 미리견합중국(美利堅合眾國)에서 사망한 여협 장애령이 일찍이 이 비급을 중원의 만다린어로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번역된 비급을 읽는 것은 우리는 읽은 거로 쳐주지 않는다. 일찍이 '협객행'을 해본/읽어본 우리로서는 과두문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몸으로 읽어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과연 그 비급을 직접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졸립고 지루한 건지가 매우 궁금하다는 건데, 아무튼 책 뒤 부록의 판보췬의 글은 사실 내 입장에서는 영화 <해상화열전>보다 훨씬 더 지루했다.

 

4. 다시 '두꺼운 텍스트'로 돌아가서 말한다면, 텍스트 자체에 두껍고 얇은 게 있는 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두꺼운 기술이라는 개념에서 두꺼운 텍스트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쓰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고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두껍든 얇든, 기름지든 퍽퍽 하든, 복합적이든 단순하든 간에, 어떤 대립적이고 이원적인 규정을 통해서라고 할지라도, 텍스트 자체에 귀천이 있다는 식의 접근은 본디 '문화연구'의 정신이랄까 태도에는 반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근대국가를 단위로 한, 그것도 근현대의 문학사의 서술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소위 정전 개념 자체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정전 개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까탈스런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할지라도 말이다. 문학사 서술에서 대표적인 작품을 예시적으로 열거하거나 설명하는 행위 자체가, 더 무언가 정전에 속하는 듯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임춘성이 '두꺼운 텍스트'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한 것은, 한편으로는 문학사 서술에서 불가피한 바로 그 정전 개념의 난점을 우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컨대, 문화연구 분야에서 잘 알려진 바르트 식의 텍스트 이분법(lisible vs. scriptible)의 엘리트주의적 성향도 일정하게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핵심은 임춘성이 두꺼운 텍스트로 분류한 작품들이 과연 어떠한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이 책에서 임춘성이 공들여 다룬, 김용의 소설들, 가오싱젠의 소설, 왕안이의 소설이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 및 포사 문화연구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임춘성 자신의 연구나 비평이 두껍게 이루어진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두꺼운 텍스트였기 때문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오싱젠과 왕안이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왕안이의 작품은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이번 기회에 가지게 되었다. 왕안이 작품에 대한 임춘성의 연구-비평적 디스크립션은 두텁게 성공한 것이다. 한편, 나는 가오싱젠의 작품에는 끌리지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임춘성의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이런 류의 서사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가오싱젠은 그 자체로 매우 지겹고도 싫다. 노벨상을 탔다고는 하지만 내게는 그다지 노벨스럽지 않다.

임춘성의 경우, 전반적으로 각 글들의 많은 분량이 해당 분야, 그러니까 여러 '문파'들의 선행 이론이나 연구나 비평의 소개에 할애된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갖는다. 대학 상급생이나 대학원의 연구 입문자에게는 필수적인 배경 지식을 선별, 요약해서 알려준다는 점에서 아주 긍정적일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문학 연구자들에 대한 과거의 내 선입견 내지는 편견에 의하면 특히 그렇다.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문학 연구자들이 무식 내지는 무지하다는 게 과거의 내 견해였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에 내가 읽어본, 중국 문학연구 분야의 글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기는 하다.

나쁜 점은 선행 이론이나 연구나 비평에 대한 상당 분량의 요약이나 설명, 혹은 더 나아가서 이런 것들끼리 서로 토론시키는 바의 소위 다성적 접근은 그것 자체로 힘이 부치고 지면을 많이 잡아먹는 법이라서 그런지, 정작 임춘성 자신이 자기의 목소리로 논해야 할 대목에서는 싱겁게 끝나버린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특히, 타이완과 홍콩에 관한 글이 심했고, 제일 실속이 없는 글은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 성과를 개괄한 제13장이었다.

다른 이들의 견해에 대한 소개 및 요약이나 설명 등이 많다는 것은, 달리 이해하자면, 그 만큼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에 임할 때 문화연구에 아주 친화적이라는 임춘성의 입장이나 관점 자체가, 한국에서 이뤄지는 중국 근현대 문학사 연구 및 서술의 장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타자화되어 있다고 임춘성이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곰곰이 따지고 본다면, 문학 분야에서든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든 '근현대'의 형성이라는 것은 담론적으로 보아서 소위 타자화의 메카니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어느 국민국가에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소개 등에서 힘을 빼버려서 정작 제 이야기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랑은 이번의 이 책으로 충분한 듯싶다. 앞으로는 두텁든, 깊든, 꼼꼼하듯, 섬세하든 간에 임춘성 나름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

타자로 배제되었거나 억압된 작품들을 문학사에서 발굴해내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배제되었거나 억압된 작품들을 중심에 놓고 말한다면, 문학사라는 것은, 정전을 중심으로 한 영광스러운 만신전이 아니라 결국 일종의 버려진 낡은 묘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버려져서 터만이 남은 옛 묘지에서 묘비명도 없이 묻힌 작품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조심스레 이장하거나 안장하는 행위는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문학사적 유골 파편을 정밀 감식하는 일은 연구자 자신의 개성적인, 동시에, 임춘성 자신의 표현을 빌면, 두꺼운 비평적 실천의 목소리에 의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비평적 실천은 결국 일종의 굿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무당-연구자의 목소리와 죽은 저자-텍스트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게 되는 것이다

 

* 이 글은 [문화/과학] 74호에 실린 이재현(문화평론가)님의 서평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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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 스투디움 총서 3
임춘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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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과 통섭을 위하여

 

 

1.

 

중국 근현대문학은 세계문학사의 맥락에서는 제3세계문학에 속하는 주변부문학이고, 한국문학계에서는 비주류문학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문학을 업으로 삼다 보니 본업뿐만 아니라 중심부와 주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문사철文史哲을 근간根幹으로 하는 중국학sinology에 대한 공부 또한 게을리 할 수 없었고 나아가 중국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사회과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등한시할 수 없다. 이들 공부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총체적 관점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선택은 개인의 자유의지였지만 세계문학사와 한국문학계의 담론권력 구조에서 주변이자 비주류인 중국문학을 선택한 순간 내 공부의 운명도 결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문학 분야에서 중심은 영미와 프랑스 중심의 서유럽문학이었고, 한국문학계에서는 서유럽문학과 교배한 한국문학이었다. 중국문학은 2천 년이 넘는 연속적 흐름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학사와 한국문학계에서는 제3세계문학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나마 고대문학 작품 몇몇은 고전으로 인정되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지만, 근현대문학의 경우에는 한국문학계라는 콘텍스트에 부합할 때 잠시 주목을 받는 장신구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문학은 문자 그대로 중국과 문학으로 구성된다. 전자에 방점을 두면 중국연구Chinese studies의 일부로서의 중국문학이 되고 이때 문학 텍스트는 중국 이해하기의 사례 또는 경로로 자리매김 된다. 문화연구에서도 그것은 서양 최신 이론의 가공을 기다리는 원재료이기 십상이다. 이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지금 여기now here’가 거론되지만 그 또한 만만한 일은 아니다. 후자에 중심을 두면 보편적인 문학 일반 가운데 특수한 중국의 문학이 된다. 중국 중심의 사유와 문학 중심의 사유가 중국문학 내부에서 화합하기는 쉽지 않아서 지금껏 중국문학은 중국과 문학을 아우르기보다는 양자의 교집합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를 진행해온 셈이다.

중국 근현대문학은 여기에 근현대라는 범주를 추가한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중국문학그리고 근현대의 교집합만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영역을 축소했다. 이제 그 울타리에서 나와 중국과 중국, 문학과 문학 그리고 근현대와 근현대를 횡단하고 나아가 이들을 통섭하는 것을 공부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공부는 학문의 경계에 놓여 있다. 경계는 담론 권력의 바깥을 주변화 시킨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변의 관점에 철저할 필요가 있다. 주변의 관점은 우리에게 철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간 세계문학의 주변부였던 한국문학은 국내에서 중심부 서양문학과 손을 잡고 기타 문학을 다시 주변화 해왔다. 주변이 그 장점을 온존하면서 중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담론권력 구조에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내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부분이 근현대적 분과학문 체계를 뛰어넘어, ‘예술과 학문과 사회 간의 수평적 통섭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류 앞에 통제사회와 문화사회의 갈림길이 놓여 있다는 심광현의 주장을 음미해야 할 지점이다. 지역연구와 문화연구는 분과학문 체계에 갇힌 중국문학 연구에 학제간의 횡단 나아가 통섭의 가능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2.

 

근현대문학이란 개념에 처음 생각이 미친 것이 벌써 15년이 넘었다. 20세기중국문학사 담론의 제출과 확산 과정을 보면서 담론에 작용하는 권력을 인지했고 그것이 텍스트를 선택하고 지배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이를 이 책에서는 타자화othernization’라 이름했다. 이 지점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의 만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책을 관통하는 방법론이 있다면 그것은 푸코에게 빚지고 있다. 처음부터 푸코를 독파하고 내면화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 근현대문학의 연구 현장에서 가졌던 문제의식들을 헤쳐 나오다 보니 어느 지점에선가 푸코를 만나게 되었다. 푸코의 담론 개념은 배제exclusion’를 전제하고 있다. 그의 기본적인 가설은 이렇다.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재하는 일련의 과정들담론의 힘들과 위험들을 추방하고, 담론의 우연한 사건을 지배하고, 담론의 무거운, 위험한 물질성을 피해 가는 역할을 하는 과정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배제의 과정들이라 일컬었다. 회의주의와 비환원적 태도를 특징으로 하는 푸코의 시선을 통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문학 등의 근현대 분과학문과 대학 제도라는 관행의 이면에 무엇인가 작용해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푸코는 그것을 권력훈육 권력’, ‘지식 권력’, ‘담론 권력등등이라 일컬었고 푸코의 학문적·실천적 삶은 권력의 작동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트주의postism 또는 포스트학postology이 출현하면서 그 이전, 즉 근현대시기에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수도 없이 반복 낭독하고 청취하다가 무의식에까지 각인된 민족nation’상상된imagined’(Anderson) 것이고, 오래 전에 형성되어 면면히 흘러내려와 반드시 수호해야 할 것으로 알았던 전통tradition만들어진invented’(Hobsbawm and Ranger) 것이며, 심지어 이성과 함께 근현대를 열었다고 일컬어지는 주체subject’구성된consisted’ (Foucault)이다. 근현대 분과학문 체계도 포스트주의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속(after, )’발전(de-, )’의 의미를 절합하는 포스트의 방법론을 온전하게 전유할 때 중국 근현대문학은 중국문학그리고 근현대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횡단과 통섭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푸코 및 포스트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빌어 중국 근현대문학사의 관행을 파헤치고 새로운 문학사의 구성을 위해 몇 가지 지점을 점검하는 것이다.

 

3.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총론으로, 이 책의 대주제인 담론과 타자화의 두 가지 사례를 20세기문학과 두 날개 문학근현대문학사 기점과 범위로 나누어 고찰했다. 전자는 신문학’, ‘셴다이문학’, ‘진셴다이近現代 100년문학’, ‘20세기문학’, ‘셴당다이現當代문학’, ‘두 날개 문학등 계속 미끄러져온 기표를 일단 근현대문학으로 고정시키고, 5·4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온 근현대문학사에 관한 담론을 고찰하는 동시에 그 내부에 온존하고 있는 타자화의 정치학politics of othernization’을 규명했다. 후자는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 중국 근현대문학사의 기점과 범위에 초점을 맞췄다. 기점 면에서 첸리췬 등의 20세기중국문학사가 1898년을 기점으로 제시했고 판보췬은 1892년으로 앞당겼으며 옌자옌은 1890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왕더웨이에 따르면 1851년 태평천국太平天國 시기로 앞당겨진다. 문학사 범위도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삼분법 시기의 셴다이문학사는 좌익문학사였지만, 20세기중국문학사에서 우파문학을 복권시켰고 두 날개 문학사에서 통속문학을 복원시켰다. 21세기 들어 중국 근현대문학사는 초국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중국문학Chinese Literature’으로부터 중어문학漢語文學. Chinese Literature’으로 그리고 중국인문학華人文學. Chinese Literature’으로 자기 변신하고 팽창하면서 재구성 단계에 들어섰다.

2부에서는 중국 근현대문학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몇 가지 주제를 선택했다. 먼저 언어와 장르에서는 54백화문운동에서 제기된 구두어의 실체와 문제점, 54식 백화를 비판하며 전개된 대중어운동과 라틴화운동을 고찰했고, 고대 장르에서 근현대 장르로 전변하는 과정에 대해 고찰했다. 대중화와 실용이성은 그동안 배제되었던 통속문학을 고찰하는 핵심어다. 중국 근현대문학 대중화의 허실을 검토한 후 무협소설과 대중화의 관계를 고찰하고 리쩌허우의 실용이성을 빌어 진융 무협소설에 나타난 위군자의 권력욕망과 진소인의 생존본능을 분석했다. 동아시아 문화 횡단과 공동체의 가능성에서는 중국 근현대문학사를 보기 위한 동아시아 시야와 관련해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유동과 횡단, 반한과 혐중, 포스트한류와 한국문학, 동아시아 공동체 등을 고찰했다. 마지막으로 중체서용과 지식인의 문화심리구조는 문사철 전통이 승한 중국에서 근현대 지식인이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외래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기본적인 문화심리구조에 대해 논했다. 주로 중체서용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민두기의 새로운 해석 그리고 리쩌허우의 서체중용 등을 통해 고찰했다.

3부는 각론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성찰적 글쓰기와 기억의 정치학에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글쓰기를 상흔 글쓰기와 성찰적 글쓰기로 나누고, 그 가운데 성찰적 글쓰기에 대해 고찰하면서 폭력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아울렀다. 그리고 가오싱젠의 작품을 통해 기억의 정치학을 고통의 기억, 기억의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했다. 포스트사회주의시기의 문학지도에서는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인 포스트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한 후 이 시기의 문학지도를 그려보았다. 포스트냉전시기 타이완 문학/문화의 정체성에서는 계엄 해제 이후 타이완의 문학/문화의 정체성을 포스트냉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했다. 먼저 아시아의 냉전과 포스트냉전에 대해 검토한 후 최근 중국 근현대문학사의 타이완문학 기술의 변화를 분석했다. 그리고 계엄 해제 이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 문제가 여전히 타이완문학과 문화에 중요한 논점임을 확인했다. 홍콩문학의 정체성과 포스트식민주의에서는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홍콩문학의 정체성을 논했다. 먼저 홍콩문학을 바라보는 기존의 두 가지 시선을 검토한 후 새로운 시선으로서 포스트식민주의를 제시했다. 무협소설 전통의 부활과 근현대성에서는 개혁개방시기 유행한 신파 무협소설이 사실은 1949년 이전에 흥성했던 구파 무협소설과 연계되어 있음을 밝히고 무협소설의 근현대성을 애국 계몽과 상업 오락, 한족 중심과 오족공화, 다양화와 혼성성에 초점을 맞춰 고찰했다. 도시문학과 상하이 글쓰기는 포스트사회주의 시기 급속히 진척된 도시화에 초점을 맞춰 도시문학과 상하이 글쓰기에 대해 논했다. 주로 상하이 도시공간에 대한 담론에 중점을 두었다. 아울러 왕안이의 장한가상하이 민족지ethnography’로 설정해 문학인류학의 가능성을 점검했다.

보론 한국의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에서는 1970년대까지를 연구의 전사(前史), 1980년대를 개척기로, 그리고 1990년대 이후를 발전기로 설정하되, 1990년대 이후의 현황을 중심으로 그 주요한 흐름을 따라 간략하게 정리하고 몇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부록에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20세기 중국문학을 논함1985년 발표되자마자 국내외의 호응을 얻었던 글이다. 통속문학과 두 날개 문학은 바로 순문학과 통속문학의 두 날개가 ‘20세기 중국문학사를 제대로 날게 할 수 있다면서 통속문학을 근현대문학사에 편입할 것을 주장했다. 두 편의 글은 각각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던 ‘20세기 중국문학담론과 두 날개 문학담론의 선언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느지막이 읽고 쓰는 일에 재미와 의미를 부여하고 한 걸음 씩 걸어가는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며 성원해주는 한국 중국현대문학학회 동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읽고 쓸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을 제공해준 목포대학교와 그간 함께 해온 동료 교수들 그리고 내 강의를 경청해준 학생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뒤늦게 조우한 문화/과학의 동인들은 횡단과 통섭의 안내자이자 동반자다. 생산적이고 치열한 만남을 다짐해본다. 끊임없이 차이를 반복함으로써 불편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아내 유세종은 나를 되비치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부디 건강을 회복해 더불어 반복의 차이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흔연히 출판을 수락해주신 문학동네 강병선 대표님과 인문팀의 고원효 편집장 그리고 송지선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하지 못한 시공간에 대한 작은 보상의 의미가 되길 기대하며 은영과 하영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의 인문저술사업의 지원을 받았고, 지금까지의 공부를 일단락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가고픈 열망을 담았다. 강호 제현의 질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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