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 스투디움 총서 3
임춘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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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재현의 중국 근현대문학사 쓰기의 새로움과 낡음(문화/과학74, 375-386)에 대한 답글이다.

 

 

 

1. 외래어 표기 또는 용어 문제

 

외래어 표기법은 문제적이다.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학회나 출판사나 나름의 표기법을 만들어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국가기관이 주도한 사회적 합의로 보고, 특정 단체에서 그것을 문제적이라 생각한다면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것을 무망하다 여기고 자신만의 합의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의 문제점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립국어원은 그 문제를 개방적으로 검토해 새로운() 표기법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그 표기를 재고해야 할 것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를테면 서구라는 표기가 대표적이다. ‘서구(西歐)’서구라파(西歐羅巴)’의 약칭으로, ‘‘Western’을 의역한 것이고, ‘구라파유럽(Europe)’을 음역하여 歐羅巴(Ouluoba: 어우뤄바)’로 표기한 것이다. ‘유럽어우뤄바의 음가가 얼마나 근접한 것인지와 무관하게, 중국인들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약속했고 그래서 상호 의미 전달에 지장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한자만 들여와 우리식 한자음으로 독음하고 있다. 우리는 자의적 약속이 아니라 추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 서구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고 싶지 않을 것이지만, 너도나도 서구라고 쓰는데 나 혼자 굳이 서유럽이라고 쓰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통념의 힘이고 소통의 정치학일 것이다. 서양 각국의 이름도 비슷한 경로로 우리에게 수입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英格蘭(Yinggelan: 잉거란)이라는 나라를 줄여 英國으로 표기하고, 미국은 美利堅(Meilijian: 메이리젠)이라는 나라를 줄여 미국으로 표기했다. 우리는 그것을 몰주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아시아 담론을 운위하고 세계문학과 소통하려 한다면 동아시아에서 소통할 수 있는 대응 기표를 찾고 나아가 세계문학과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경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modernnation의 번역어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미리 전제할 것은 아래의 검토가 통합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 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1-1.modern: 현대와 셴다이

 

박사과정에 입학해 뒤늦게 중국현대문학으로 전업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명제에서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혁명 시기(1919-1949)의 문학을 지칭했던 이른바 셴다이(現代)문학은 한자 기표의 동일함을 근거로 우리에게 현대문학으로 수용되었다. nation을 민조꾸(民族)로 번역한 일본식 표기를 한자 독음으로 수용한 것처럼 말이다. 民族민조꾸/민족으로 각기 표기되어도 그 기의가 같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現代의 경우는 중국의 셴다이와 한국의 현대라는 표기가 지칭하는 기의가 다르기 때문에 기표도 달리 표기하는 것이 좋다. 중국 셴다이문학이 종결된 시점(1949)에 한국 현대문학이 시작(1948)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박사논문을 완성할 무렵이었고, 그래서 1917-1949년의 대중화론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 제목에 전기라는 용어를 사용해 1949년 이후와 변별했다. 한국에서 근대와 현대의 구분이 모호했던 반면, 중국은 진다이(近代. 아편전쟁 이후)셴다이당다이(1949년 이후)의 이른바 삼분법‘20세기 중국문학론이 제기되기까지는 견지되고 있었다. 대학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중문학부(中文系) 내에 셴다이문학 교연실(敎硏室-전공에 해당)과 당다이문학 교연실이 나뉘어 있고 베이징대학 대학원의 경우는 지금도 신입생을 교연실 별로 모집하고 있다. ‘20세기 중국문학론은 혁명 이전 단계와 이후 단계를 구분하려는 셴다이와 당다이의 장벽을 타파하고 그것을 하나의 유기적 총체로 봐야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면 진다이는? 이는 구민주주의 혁명시기이기에 20세기 중국문학론에서도 그 일부만 용납했을 뿐 전체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현대적(modern)’이므로, 그것이 인지 인지를 변별하는 것은 정치논리에 불과하다. 사실 삼분법 자체가 혁명사 시기구분의 외연인 만큼,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려는 나의 시도가 중국 근현대문학’(1997)이라는 기표로 표현됐고, 이를 확장한 것이 동아시아 근현대’(2008)라는 기표였다. 이것은 근대와 현대 또는 진다이와 셴다이 그리고 당다이를 단순 통합한 것이 아니라, ‘서유럽 모던의 대응 개념으로 내발적/외발적 요인에 의해 시작된 동아시아의 새로운 단계를 지칭하기 위함이었다. 이 가설적 개념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리쩌허우(李澤厚)近現代라는 용법을 참조했기 때문이었다.

리쩌허우는 그의 주저인 사상사론시리즈에서 古代近代 그리고 現代를 다루면서 當代라는 별책을 내지는 않았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當代를 별도로 다룰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當代를 독립 시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중국현대사상사론의 내용 대부분이 이른바 셴다이에 국한된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 중국문예 일별같은 글은 그 범위를 20세기 전체로 확장하고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도처에서 近現代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진셴다이는 이 글의 근현대와 내포와 외연을 같이 하는 개념이다. 그는 진다이셴다이를 별책으로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진다이셴다이를 하나로 묶어 진셴다이(近現代)’라 칭하면서 그에 대한 시기구분을 시도했다. 미리 알아둘 것은 그의 시기구분이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관점과 대상에 따라 유연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근대사상사론에서 세 차례 시대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1) 이를테면 중국 전체의 근현대를 (1) 18401895, (2) 18951911, (3) 19111949, (4) 19491976, (5) 1976 이후의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2) 또 중국 근현대 지식인의 세대구분을 시도하는데, (1) 신해 세대, (2) 54 세대, (3) 대혁명 세대, (4) ‘삼팔식세대에다가 (5) 해방 세대(1940년대 후기와 1950년대)(6) 문화대혁명 홍위병 세대를 더하면 중국 혁명의 여섯 세대 지식인이다. 그리고 (7) 7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 시기일 것이라 했다.

3) 신해혁명이 실패한 후 지식인의 세대구분을 세밀하게 했다. (1) 계몽의 1920년대(191927), (2) 격동의 1930년대(192737), (3) 전투의 1940년대(193749), (4) 환락의 1950년대(194957), (5) 고난의 1960년대(195769), (6) 스산한 1970년대(196976), (7) 소생의 1980년대, (8) 위기의 1990년대. 이는 10년 단위로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좋아하는 중국인의 문화심리구조를 염두에 둔 개괄로 보인다.

4) 20세기 중국(대륙)문예 일별에서는 지식인의 심태(心態) 변이(變異)’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전환의 예고(1898 戊戌1911 辛亥), (2) 개방된 영혼(19191925), (3) 모델의 창조(19251937), (4) 농촌으로 들어가기(19371949), (5) 모델의 수용(19491976), (6) 다원적 지향(1976년 이후).

이런 맥락에서 중국 근현대는 아편전쟁 전후 어느 시점에 시작해 지금까지의 시기를 유기적 총체로 보자는 것이고, 이전 단계의 삼분법 또는 사분법의 단절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중국 근현대 장기지속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1-2. 네이션/국족과 에스닉/민족

 

nationethnic을 발음대로 네이션에스닉으로 표기하는 것이 한 노선이고, 그것을 가능한 한글로 번역하자는 것은 또 다른 노선이다. 전자를 외국화(foreignization)’라 한다면 후자를 자국화(domestication)’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장점은 개방적이다. 굳이 우리 어휘에 없는 단어를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번역하는 것보다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치즈, 커피, 초콜릿 등은 이제 한글을 풍부하게 해주는 단어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초기에는 구구한 해설이 필요하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라디오나 피자처럼 아무도 그것이 뭔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 도달할 것이다. 반면 외국화를 들이대기로 간주하고 그보다는 길들이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국화론자들은 출발어(source language)에 해당하는 도착어(target language)를 최대한 자국어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들은 nation을 처음 접했을 때 民族(민조꾸/민쭈/민족)을 선택했지만, nationstate와 긴밀한 관계(nation-state)에 있음을 새로이 인지하곤 民族이라는 도착어보다는 궈쭈(國族, 타이완), 음역(일본), 국민(한국) 등으로 바꿔 표기하고 있다. 나는 궈쭈라는 기표에 동의하면서 그것의 한자 독음 표기인 국족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현대와 셴다이의 기의가 달라지는 것과는 변별되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거나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에스닉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범주에 국한해 이를 네이션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민족을 번역어로 선택했다.

 

1-3. 김용과 왕안이

 

모택동과 등소평은 그래도 익숙하지만 호금도와 습근평은 그렇지 않다. 익숙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중매체로 귀결된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대중매체에 길들여지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모택동 하면 그렇게 인식하고 시진핑 하면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영웅문이 유행하던 1980-90년대에 중국인명의 원발음을 존중하자고 생각한 대중매체가 있었는가? 김용이란 기표는 그렇게 한국에서 소통되었고 나는 그것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상호성의 원칙이라는 것도 있고 소통의 정치학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는 것이 세상에 유일한 고유명사의 원래 발음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내가 린춘청으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것처럼(그렇다고 중국 친구들이 그렇게 부를 때 모른 채 할 수는 없다) 왕샤오밍(WANG Xiaoming)도 왕효명으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표는 자의적인 만큼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습근평으로 표기하든 시진핑으로 표기하든 그 기의가 동일하다면 굳이 어느 한쪽을 우길 필요 없다 이는 시비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나 한국의 현대와 중국의 셴다이는 한자 표기가 같을 뿐 기의가 다르다. 그러므로 양자의 표기를 변별해주어야 한다. 무협소설 주인공들의 이름표기를 고민하다가 고대 인명은 한글 독음으로 읽는다는 원칙을 적용했는데, 거란인 蕭峰을 거란어 발음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은 백 번 타당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않은 것은 그 접근이 쉽지 않거나 게으름(이재현의 표현에 따르면 귀차니즘)의 증거다.

 

2. 20세기 중국문학과 두 날개 문학

 

첸리췬 등의 ‘20세기 중국문학과 판보췬의 두 날개 문학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그 허점을 파헤치는 이재현의 필봉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괴테가 중국의 전기(傳奇) 작품의 프랑스 번역본을 읽은 후 세계문학 개념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황쯔핑천핑위안첸리췬의 추정에서 전형적인 내셔널리즘/국족주의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은 날카롭고, 그들이 언급한 풍월호구전과 그보다 뒤에 번역된 화전기옥교리등의 재자가인 소설에 대한 언급도 치밀하다. 사실 괴테에게는 중국문학 이전에 페르시아문학의 세례가 있었다. 칠순을 바라보던 괴테가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독일어 번역본을 받아 읽고 느낀 시적 감흥에 자극 받아 쓴 239편의 시들을 12개의 주제로 나누어 연작시 형태로 묶은 시집인 서동시집, ‘중국-독일식 하루와 일 년의 시간’(Chinesisch- Deutsche Jahres und Tageszeit)라는 제목 아래 14편의 연작시로 결실을 맺은 시기보다 14년 앞선다. 그러므로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을 중국문학에만 연결시키는 첸리췬 등의 논술은 분명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 20세기 중국문학 담론은 발표된 지 30년 가까운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문제가 많다. 이재현이 지적한 것과 내가 비판한 것개방형 총체를 지향했음에도 중국 내에 국한, 연구와 교학 사이의 괴리, 지식인 중심의 계몽에 초점외에도 서양중심론의 영향, 충분치 않은 모더니제이션 등의 비판이 있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중국문학 담론이 제기된 맥락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문학사와 현대사 연구 속에서 毛澤東신민주주의론모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었다는 첸리췬의 고백은, 20세기 대륙을 지배했던 마오쩌둥 문화의 산물임을 자인하는 민간 이단사상 연구자의 언급이기에, 충분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부언하면, 1989톈안먼 사건그리고 1992남방 순시 연설이후의 중국을 일당전제-정 국가로 파악하고 있는 첸리췬은 이른바 덩샤오핑의 ‘64체제가 마오쩌둥의 ‘57체제를 계승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마오쩌둥 사후 그에 대한 과학적 비판의 부재가 톈안먼 사건으로 귀결되었기에 뒤늦게라도 어떻게 마오로부터 빠져나올 것인가?”를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이는 첸리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오쩌둥 사상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마오쩌둥 문화는 전통 중국 밖에 존재하는,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로, 이는 중국 대륙의 새로운 국민성을 형성케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지식계는 그 과제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첸리췬의 이런 평가를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국문학사 담론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54 이후 신문학에 의해 타도되고 문학사에서 지워졌던 통속문학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중국근현대문학사에 복권된 것은 실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물론 지금도 모든 논자들이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재현이 거론한 린자오(林昭)의 혈서라든가 구준(顧准)의 일기 등은, 린줴민(林覺民)아내에게 보는 편지나 루쉰의 양지서등을 문학사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문학사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수민족의 작품도 빼놓을 수 없고 일제 강점기 타이완 작가인 양쿠이(楊逵)의 일본어 작품도 다 비석을 세워줘야 할 대상들이다. 다만 담론의 속성상 과정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게 새로운 문학사를 쓰라면 이재현의 권고를 받아들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중국근현대문학사를 새롭게 쓰려는 의지가 없고 그보다는 더 생기발랄한 주제와 텍스트로 나가려 한다.

 

3. 學而思

 

논어』「위정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무척 익숙하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하되 사()하지 않으면 어둡고, ()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쯤으로 직역할 수 있는 이 구절은 역대로 를 독서와 사고로 이해하고 양자를 겸비할 것을 권하는 문구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실천적 지식인 신영복은 오랜 한학 공부를 바탕으로 독특한 해석(interpretation)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학과 사를 대()로 보아 학은 배움(learning)이나 이론적 탐구로 보되,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思索)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실천 또는 경험적 사고로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관행적 해석인 관념적 사고와 다르다. 학이 보편적 사고라면 사는 분명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내 공부는 여전히 학()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학이불사를 경계하며 임춘성 나름의 목소리를 내라는 이재현의 충고는 뼈저리다. 이런 요구가 사이불학으로 나가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부를 일단락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픈 열망가운데 독서와 사고 또는 이론적 탐구와 실천/경험적 사고의 변증법적 절합인 학이사(學而思)’의 경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다. 관건은 어느 한쪽으로 환원시켜서도 안 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이재현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신랄하고 비유는 현란하고 대담하다. 글 전체를 무림대회로 비유하면서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를 정파로, 문화연구를 사파로 설정하기도 했고, 관례적인 서평을 드립질로 조소하는가 하면, 중국 근현대문학이 수십 개의 촉수를 지닌 에어리언이나 여러 개의 목을 가진 히드라로 표상되어야 한다는 표현은 은연중 중국(문학)을 괴물에 비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는 예전에 세계문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영문학과 중문학을 타파해야 한다는 조동일의 주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미는 두터운 비평적 실천버려진 낡은 묘지터에서 묘비명도 없이 묻힌 작품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조심스레 이장하거나 안장하는 행위, 이는 무당-연구자의 목소리와 죽은 저자-텍스트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게 되는 것이라는 비유다. 이는 왕년에 이름을 날리던 민중문학 진영의 평론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느낌을 준다. 요즘 저술에 몰두하면서 여전히 ---을 넘나들며 수작을 벌이는 그가 최근 중국에 필이 꽂혀 관련 서평도 자원해서 쓰고 여러 가지 비평적 잡문을 쏟아내는 것은 펑유입장에서도 중국학 전공자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왕년의 왕성한 필력을 지면에서 자주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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