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협소설사
이진원 지음 / 채륜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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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의『한국무협소설사』(2008)로 인해 우리는 한국 무협소설이라는 독자적인 연구영역과 그 역사에 관한 연구서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기존 한국에서 창작·번역된 무협소설과 그에 관한 평론 및 연구를 최초로 망라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한국 무협소설이 중국 무협소설의 단순한 번역 또는 번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 기원을 조선 시대 또는 그 이전까지 소급하여 영웅소설이나 군담소설에서 무협소설의 맹아를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 중국 무협소설의 영향과 무관한 일제강점기의 역사무예소설을 그 후예로 삼고 1980년대의 창작 무협소설과 1990년대의 신무협을 그 ‘창조적 계승’으로 설정하며 그 흐름을 ‘한국적 무협소설’로 명명한다. 한국 무협소설은 바로 이 ‘한국적 무협소설’과 중국 무협소설을 모방하여 창작한 ‘중국식 창작 무협소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기존 연구 가운데 박영창의「중국 무협지 번역의 역사」는 ‘한국의 무협소설’을 ‘김광주’, ‘워룽성(臥龍生)’, ‘창작무협’, ‘진융(金庸)’, ‘재판 중국무협’, ‘창작무협 부흥’의 여섯 단계로 나누었는데, 절반이 중국 무협소설의 번역 및 번안이고 나머지 절반 가운데 하나는 모방이다. ‘한국 무협소설’은 ‘중국 무협소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진원의 저서에서도 기원을 모색하는 1장과 2장을 제외한 3장과 4장의 12절 가운데 ‘한국적 무협소설’과 직접 연관된 부분은 네 절(14. 80년대 무협소설의 새바람; 18. 한국적 무협소설, 그 모색의 길; 19. 신무협의 등장; 20. 판타지와 신무협의 공존)뿐이다. 영향 관계를 서술한 부분(12. 중국`일본 무협소설의 영향 속에 성장한 한국 무협소설)까지 포함해도 다섯 절에 불과하다. 한국 무협소설은 순수한 창작만으로 자신의 역사를 구성하기에는 아직 빈약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한국무협소설사』에서 중국식 창작 소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중국 무협소설 번역·수용의 역사를 서술 범위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진원과 달리, 전형준은『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2003)에서 한국 무협소설의 외연을 무작정 확대하기보다는 그 독특함을 챙긴다. 오랜 기간 ‘문학’ ‘평론’에 종사해온 그에게 무협소설에서 ‘한국적’ 정체성을 모색하는 시도는 ‘서유럽 지향적 무의식’과 ‘민족주의적 무의식’의 공모’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좌백 이후 한국의 무협소설을 ‘신무협’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워룽성·진융·구룽(古龍)에 대한 전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전복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후속작업이랄 수 있는『한국무협소설의 작가와 작품』(2007)에서 전형준은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문학을 ‘문학’으로 승격시켜 진지하게 ‘평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전복’이라 명명한 내용이 명실상부한 ‘전복’인지는 대조가 필요하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신무협은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이라는 기존 무협소설의 틀을 초월하거나 전복하고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존적 탐구를 나름대로 의미 있게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신무협은 문학 수준의 향상, 내용과 형식면에서의 독자성, 근현대성과 포스트근현대성 그리고 문화적 동시대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 진영의 진지한 ‘평론가’가 ‘삼류문화의 온상’이었던 무협소설을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놀라운 문학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무협이 전복했다고 하는 대상으로 한국의 무협소설 외에 중국 무협소설 작가들까지 포함한 것은 섣부르다. 특히 1980년대 중국 대륙의 캠퍼스를 점령하고 1990년대 경전화(經典化)된 진융의 작품과 관련해, 한국 신무협이 전복한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최소한 ‘신무협’의 전복적 내용이 진융의 작품에서 발견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럴까?
무협소설이라는 장르가 ‘중국적’ 성격이 강하고 한국 무협소설에 대한 영향도 지대하므로,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를 기술할 때 그에 대해 적절하게 언급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의 관련 담론을 보면 중국 무협소설에 대한 오해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김용의 영웅문’을 중국을 대표하는 무협소설로 간주하고 그것을 독파하면 중국 무협소설을 정복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앞당겨 말하면, ‘진융의 사조(射雕)삼부곡’을 번역한『소설 영웅문』은 완역이 아니라 70% 수준의 번역이었고 그 문체라든가 문화적 측면까지 평가하면 50% 이하의 번역물이다. 그러므로 ‘김용의 영웅문’은 ‘진융의 사조삼부곡’과는 다른 별개의 텍스트이자 한국의 문화현상인 셈이다. 김광주의『정협지』를 번안 내지 창작소설이라 한다면, ‘영웅문’ 또한 축약 내지 생략했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번안이라 할 수 있다. ‘영웅문’의 번안`출판은 한국적 맥락에서 이전 단계의 무협지라는 통념을 깨뜨린 사건이었지만, 중국적 맥락에서는 원작의 의미와 재미를 상당히 훼손시켰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한국의 ‘영웅문 현상’에서 이상한 점은 진융의 작품이 모두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유독 ‘영웅문’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영웅문’의 원작인 ‘사조삼부곡’이 흥미로운 작품인 것은 틀림없지만, 문화적 측면에서『소오강호』,『천룡팔부』,『녹정기』로 이어지는 후기 대작들이 훨씬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협객의 성격만 보더라도, 유가적 협객(원승지`곽정), 도가적 협객(양과), 불가적 협객(장무기)을 거쳐, 협객의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비협(非俠)적 인물(적운, 석파천)과 심지어 시정잡배에 가까운 반협(反俠)적 인물(위소보)로 변천해가는 계보만으로도 그 전복적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 사실과 문학작품 그리고 문화적 요소들로 충만하다. 중국 불교에 입문하려면 진융의 작품을 읽으라는 베이징대학 교수 천핑위안(陳平原)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송말부터 명 건국까지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사조 삼부곡’에서 시작하고 명말 청초의 역사 공부는『녹정기』와 함께 하면 좋을 것이라는 권유는 필자의 심득(心得)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은 장르문학으로서의 무협소설 애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이진원과 전형준의 저서에서, 진융의 ‘원작’을 통독했더라면 거론됐을 법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김용의 영웅문’(원문 기준 각 4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소오강호』(4권),『천룡팔부』(5권),『녹정기』(5권)등의 대작 장편 정도까지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진융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이 이들 6부의 대작에 구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서검은구록』(2권),『벽혈검』(2권),『설산비호』(1권),『비호외전』(2권),『연성결』(1권) 등의 장편과「월녀검」(30쪽),「원앙도」(52쪽),「백마소서풍」(104쪽) 등의 중`단편을 빼고 진융의 작품세계를 운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1990년대부터 진융의 소설은 중화권에서 교학와 연구의 대상이 되면서 이른바 ‘경전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전문 연구서만 해도 백 권을 넘게 헤아리면서 ‘진쉐(金學)’란 신조어까지 출현하고 있다. 1993년 베이징대학에서 진융에게 명예교수직을 수여하고 ‘싼롄서점(三聯書店)’에서『진융작품집』35권을 출간한 것은 그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베이징대학과 싼롄서점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수의 대학이고 출판사이다. 중화권에서 진융의 작품은 무협소설에서부터 애정소설, 역사소설, 문화적 텍스트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문 현상’은 그 스펙트럼에서 무협소설 요소만을 가져와 조악하게 재구성된 텍스트에 의존한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환영을 받았던 한류가 이제 포스트한류를 고민하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동아시아에서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는 문화횡단의 시대에, 진융의 작품도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때 진융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은 동아시아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 콘텐츠이기도 하지만, 자칫 ‘중화주의 서사’와 ‘중국 상상’을 강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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