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길을 누구에게 묻는가? - 건강한 나를 위한 따뜻한 철학 아우름 14
백승영 지음 / 샘터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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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철학 읽기



  철학의 가장 큰 목표는 안정된 상태를 뒤흔드는 것이다. ‘합’이라는 안정된 상태는 ‘반’이라는 철학의 등장으로 불안정한 ‘정’이 되고 다시 철학을 통하여 안정된 ‘합’이라는 상태로 나아간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흔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철학이며 그 흔들림의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더 안정되고 나은 상태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 역시 철학인 셈이다.  


  나는 인문학도답게 철학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학교 수업에서 여러 철학자들을 만날 때면,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예술과 관련된 미학자들이 나오면 꽤나 재미있게 수업을 듣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철학이 무척이나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철학은 어딘가에 적용되어야만 한다. 철학이 수단으로 이용되어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이 목적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인생이나 사회를 돌아보는데 중요하게 작용해야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예술이든, 인생이든,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이든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고 그저 이론으로서만 존재한다면 철학은 가치가 없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인문학을 연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고 인간의 문화를 연구하는 행위 자체는 결국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조망하기 위해 필요하다. 인문학이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사회와 연결되지 않을 때 인문학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이번 학기에는 유난히 인문학 수업이 많아서 한 학기 내내 ‘올바른 인문학의 역할’이나 ‘인문학’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철학이 우리가 방황할 때 어떤 힘을 주는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책 자체보다는 문학이 주는 위안이 더 크다고 생각되지만, 이번 학기 내내 장기적인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나름 도움이 되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내용이지만, 중간 중간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애초에 철학은 정해진 답이 없는 학문이기 때문에 나와 저자의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넘겼다. 굳이 책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책 중간 중간에 주제와 어울리는 그림들이 들어가서 눈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림에 대한 언급이 더 있었다면, 혹은 그림이 크거나 컬러로 인쇄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물론 회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개인적 취향이긴 했지만, 철학과 예술을 엮어서 해석하면 굉장히 재미있는 글감들이 많기 때문에, 철학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텍스트 자체가 심심하게 느껴졌다. 아우름 시리즈 자체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도서이기 때문에 청소년에게는 적절한 듯싶지만, 대학생이나 더 나이가 있는 분들에게는 무난하거나 약간은 심심할 만큼 쉽게 풀어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처럼 하루에 한 장씩,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철학에세이집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구절들은 인생에서 ‘고통’이 생기는 이유(p.100)나 타인과의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비유(p.56), 헛된 희망을 비판하는 파랑새 증후군(p.107)에 대한 언급, 진정한 욕망을 찾기 위한 니체의 질문(p.118) 등이었다. 짧게 인용구로 이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끝내려고 한다. 어쨌든 철학책을 읽는 묘미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철학자를 찾는 것과 자신의 상황에 철학을 대입해보면서 삶을 성찰하는 것이다. 철학이라고 하면 흔히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철학은 생각보다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 그 흔한 좌우명도 철학의 일부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철학의 일부다. 사람들이 철학을 무서워하거나 먼 존재로 여기지 않기를 바라본다.  

p.118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 네가 지금 하려고 하는 바로 그 행위, 네가 지금 하려는 바로 그 말, 그리고 현재의 네 모습. 그것들은 네가 영원히 반복하고 싶은 것들인가? 영원히 반복되기를 바랄 만한 것들인가?’ 


-니체의 이 질문은 지금 이 순간, 현재가 영원히 반복되어도 계속 설레고 기분이 좋을 만큼 그렇게 열정적으로 현재에 임하라는 뜻을 내포한다. 즉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라는 가치를 우회적인 질문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p.107 

‘희망하라, 또 희망하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긍정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희망이 망상이나 파랑새증후군 같은 것이 아닐 경우입니다. ...(중간생략)... 달리 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현실화될 가능성을 높이는 자신의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p.100  

왜 고통이 생기는지를 먼저 생각해 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생물학적 생명 유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늘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욕망하고 바라면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그 생명력이 성장으로 인도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우리에게 바로 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라고 소망하는 한, 우리는 늘 불만족 상태에 있습니다.  


- 쇼펜하우어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만약 태어났다면, 차선책은 빨리 죽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이 말 자체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의지에 속박되는 것이, 또한 욕망에 속박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지를 알려준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 자체는 늘 불만족을 수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고통을 얻게 된다. 너무 많이 놀거나 너무 많이 쉬거나 하면 분명 언젠가는 심심하다고 느낄 때가 오고, 늘 미래를 생각 못하고 여러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안락하고 편안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것만 오늘도 사람들은 굳이 일을 벌인다. 이는 곧 그들이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계속 고통 받는다. 정작 사람에게 제일 좋은 것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던 쇼펜하우어도 72살까지 장수했다. 결국 편안함을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원하고 고통을 겪는 것 자체가 생명력을 발산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p.55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바싹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떨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추위에 견딜 수 없어서 다시 한 덩어리가 되었지만, 가시가 서로를 찔러서 다시 떨어졌다. 이처럼 그들은 두 악 사이를 오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상대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했다. 

                                                                                                                                                    - 쇼펜하우어, 《여록과 보유》 


- 여기서 적당한 거리란 개인과 집단 사이의 이상적 균형이다. 나는 특정 집단에 소속되기를 즐기지 않는 개인주의자다. 나만의 시간이 있어야하고, 여러 명이 왁자지껄 모이는 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끔씩은 그런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보면 인간은 참 모순적인 동물이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적당한 거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개인과 집단 생활의 균형이 맞아야 우리 삶이 더 풍부해진다.


이 글은 샘터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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