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살아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 흔한 개인사에 속할터이나, 펼쳐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고, 현재의 잘 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펼쳐보인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이 태평성세를 향하여 안타깝게 환기시키려다가도 변화의 속도가 하도 눈부시고 망각의 힘은 막강하여, 정말로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을까, 문득 문득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지면서, 이런 일의 부질없음에 마음이 저려오고 했던 것도 쓰는 동안에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스무 살 처녀였던 박완서가 6.25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을 기록한 소설.  이처럼 6.25를 인간적으로,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이 또 있을까.

빈 집을 따고 들어가 식량을 훔쳐야 했던 나날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피어난 목련,

현저동 골목의 충충한 우물,

사랑하는 오빠를 하루만에 제대로 된 무덤도 없이 묻어야만 했던 식구들,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리게하기 위해서 브로큰 잉글리쉬를 쉴 새 없이 떠들어야 했을 때의 수치감..

이 소설은 바로 그 모진 세월에 대한 솔직하고 용기있는 기록이다. 아마 박완서님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쓸 수 없었을 터다.  어머니와 올케, 나이 어린 조카를 대신해 가장이 되어야했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에서 북에서 이리저리 체질당하는 수모를 감당했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기에 이 소설은 더욱 의미가 있다.

스무 살의 젊고 젊은, 감수성 예민했던 나이에 전쟁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당하고, 차마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볼 수 없던 시절을 겪어야만 했던 그 기억이 이  소설에는 한 점 흔들림없이 예리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역시나 박완서님의 그 절묘한 문체로. 

나는 힘들 때마다 이 소설을 읽고 위로를 받는다. 그 참혹한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 도 있구나, 그들은 이렇게나 괴로웠지만 그래도 다시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왔구나.... 유치하고 졸렬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위로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박완서 선생님을 두고 경험한 것 밖에 쓰지 못하는 작가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것은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남자네 집, 엄마의 말뚝 등 여러 소설에서 6.25와 오빠의 이야기는 반복되어 나오니까. 그러나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 박완서 선생님이 위대한 작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된장찌개처럼 구수하면서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이 분의 절묘한 표현력, 세상 사람들의 속물됨을 낱낱이 끄집어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날카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직은, 그것이 허방이든 무엇이든 세상은 살만하다고 독자들을 다독거려주는 글솜씨를 어디에 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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