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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평점 :
'05년도 발매작이자 국내에는 '06년에 소개된 하루키의 단편소설집인 '도쿄기담집'의 개정판을 다시 읽었다. 흔히 외국소설을 읽을 때에는, 특히 하루키의 경우엔 그것이 더 심해지는데 책날개에 있는 작가사진과 커버아트에서 풍기는 이미지로 인해 읽기도 전부터 고정화된 상상이 떠오르곤 한다. 사실 외국소설은 번역가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 할 수 있겠는데, 기존 문학사상사의 임홍빈 님과 이번 비채의 양윤옥 님의 번역 사이에서 큰 차이가 안느껴지고 여전히 하루키 소설의 스타일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그것도 참 번역가가 대단한건지 작가가 대단한건지 여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나 번역가나,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이런 문장을 쓴다는게 참...고스트라이터가 있을지도 ㅋㅋ
여튼, 총 5개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인데,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우연 여행자
- 이런 류의 글들은 도무지 어디서부터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일지, 조금은 헷갈리곤 한다. 소설로서 쉽게 읽히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이야기같기도 한, 다시 말해 재미가 떨어지는 글인 셈. 적어도 그가 레코드를 사모은다거나 재즈 클럽에서의 일화 같은 건 정말 작가가 겪은 일상인 듯 하다. 이 다음 편인 '하나레이 해변'과 더불어 참 재미없는 작품.
하나레이 해변
- 이것도 역시 약간의 사실이 가미된 듯 한데, 후반부에 외다리 서퍼를 봤다는 부분만 제외한다면 거의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맨 마지막 묘사인 도쿄 시내에서 땅딸이를 만났다는 것까지도 사실일 법한 의심이 든다. 전체적으로는 평범한 일기를 읽는 듯한 지루함마저 감도는 작품.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 이 단편부터 소설다운 소설이 본격적으로 등장. 흡사 '어느날 그레고리는 아침에 눈을 떠보니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카프카의 설정처럼, 주인공의 남편은 26층의 어머니 집에서 같은 건물 24층의 계단으로 내려오던 중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주변인물들은 당최 그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관찰자이자 사립탐정인 '나'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추리를 해나간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그 추리의 방법으로서 현장을 참을성있게 관찰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의미있는 결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할지라도, 관찰 그 자체로서 작가적 행위는 마땅히 성취를 이루어냈다 할 만큼 잘 써내려갔다. 다소 아쉬웠던 건 마지막의 다소 맥빠지는 결말. 아마 딱히 그보다 좋은 생각은 하기 힘들었었나 보다.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 이 단편은 하루키의 주특기인 남녀 관계의 미묘한 감정선이나 설정에 관한 탐미적인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는 여자 중에 정말로 의미 있는 여자는 세 명 뿐이야. 그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 "그날 그녀는 준페이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와인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잤다." 다소 뜬금없지만 야릇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이러한 설정은 이번에도 탁월하게 발휘되고 있는데, 이러한 하루키의 남녀 관계 묘사 그 자체로서 읽는 재미가 있는 단편이다. 다만 이 작품도 역시, 결말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여자의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상당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
시나가와 원숭이
- 다소 유머러스한 설정이라 생각했으나 이야기 전개 자체는 굉장히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는 작품. 어쩌면 조금 더 손을 본다면 장편으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름을 잃어버리는 한 여자와 그 원인을 파헤쳐보는 카운셀러의 모습에서 과거 양사나이가 나오는 '기묘한 도서관'의 분위기도 좀 나서 꽤 재미나게 읽었다. 심지어, 젊었을 적 기숙사의 미모의 여대생은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나오코를 닮아있다.
과거 문학사상사의 커버는 시나가와 원숭이를 주제로 삼았는데, 이번 비채의 커버는 하나레이 해변을 삼았다는 점에서 일단 문학사상사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이걸 읽고 나서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를 읽는 중인데, 솔직히 과거 작품이 더 끌리기는 하다. 그리고 이런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은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