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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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여유있게 책을 둘러봤다. 서점은 강원도 속초의 동아서점이라는 곳인데, 원래부터 오래된 서점이었지만 올해 리모델링을 하여 지역서점 치고는 규모도 상당히 큰 편이며 도서 구색 또한 매우 훌륭하다. 일반적으로 서울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또는 반디앤루니스와 같은 프렌차이즈 서점만 다니던 내게 이런 고고한 독자 서점의 아즈넉함은 상당히 인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 따스한 빛의 채광이라던가, 방문객을 배려한 동선 구조, 책장들의 여유로운 구성 따위가 종합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완전무결한 세계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아무튼, 서점 안은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여유로움이 넘쳤고 나는 그 시간의 파도 위에 자연스레 몸을 실듯 천천히 책들을 살폈다. 평소 소설 부분만 살펴보던 습관을 버리고, 경제/경영 부문이나 에세이, 또는 잡지나 월간물(주로 문학 관련)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개인주의자 선언'은 진작 읽어보고픈 마음이 들던 책이었는데, 직접 서점에서 실물로 보니 더욱 강하게 읽고 싶어졌다. 나는 그 책 하나를 집어들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문학 관련 월간지가 제법 많아 놀랐더랬다. 가격도 저렴하고. 세상에는 참 잡지 종류가 많은 것 같다. (안타깝지만) 팝/록 전문 잡지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읽을 거리는 넘치고 또 넘쳤다. 나는 일러스트레이트 분야에서도 그 책들의 유려한 디자인에 매혹되어 하나하나 집어들고 탐험가의 마음으로 책표지의 앞뒤를 살폈다. 소설 분야에서는 현대문학의 기 드 모파상 단편집이 눈에 띄었는데, 모파상의 수많은 작품들을 콜렉팅한 것이어서 꼭 읽어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구경한 끝에, 결국 고른 책은 김훈의 '풍경과 상처' 기행산문집이다. 이 책은 원래 1994년도에 발간된 책으로, 2009년에 문학동네에서 개정판으로 나온 것을 골랐다(2015 서울국제도서전의 문학동네 부스에서 사려 했으나 취급하지 않아 못샀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집어들고 엑스포공원 근처의 예쁜 까페에 들어가 책을 읽는 된장놀이를 이어갔다.

20년도 더 지난 글들이지만, 걱정과는 달리 글들은 여전히 생생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장은 낡지 않았고, 오히려 젊었을 적의 김훈 작가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젊은 문장들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김훈 작가라는 생각이 들게끔, 글들은 그 특유의 문장력이 이미 자립하여 있어서 한 줄 한 줄 읽기가 버거울 따름이었다.

이 책은 기행산문집으로 전국 각지의 풍경을 보고 난 후의 감상을 적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여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그것과 달리 사진은 한 장도 담겨있지 않으며 문단 구성도 소설의 그것과 같아 쉽게 읽어내려갈만한 산문집은 아니다. 더군다나, 김훈 작가 특유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풍경에 쉬이 닿게 하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을 가까스레 훓게 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어서, 읽는 중에도 혹은 읽고 나서도 사물의 본질 혹은 풍경의 중앙을 보기는 커녕 무엇을 읽고 무엇을 보았는지 짐작조차 어렵게 만드는 어리둥절함도 있다. 책의 말머리에는 '개정판을 내며' 덧붙이는 작가의 말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나는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는다. 나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려 한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도 20여년 전의 글쓰기 스타일의 특징을 정확히 꽤뚫고 있는 모양이다.

이틀간 책을 보며 책 속의 풍경을 마음 속으로 그렸다. 이제, 10월 산천의 가을 풍경을 두 눈에 가득 담으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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