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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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녀를 채근하던 조바심이 기대감으로 바뀐다. 그 순간, 그녀의 집은 잿빛 담벼락 너머에 자리한 수많은 주택 중 하나가 아니다. 오랜 세월, 권태와 지루함을 견디며 낡아가는 그렇고 그런 주택도 아니다. 그 집엔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순수한 애정과 진실한 마음이 머물러 있다. 이 순간, 그녀의 집은 특별하고 유일한 장소다. 매일 새로운 서사가 탄생하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움트는 공간이다. (P.227) 


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물론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주거의 안정을 제공해 주는 안식처 또는 보금자리로서의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주거의 공간을 넘어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의 투기의 대상이 된 지도 오래다. 그렇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으로 누군가는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고,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주거의 불안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김혜진 작가님의 신작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이토록 서로에게 의미가 다를 수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한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각의 단편은 모두 집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집(돈) 때문에 삶이 쪼그라들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재개발을 바라고 영끌로 산 집의 재개발이 미뤄지면서 고통받는 사람,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집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 돈이 없어서 월세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세입자이면서 동시에 세입자를 관리하며 그들과의 마찰을 견디는 사람들. 


집은 거주지로서의 역할을 넘어 언젠가부터 계층을 나누는 보편적인 기준이 돼버렸다. 자가, 전세, 월세로 사람들을 계급화시키고 집주인과 세입자는 갑과 을의 관계가 돼버리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현재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그런 비정상적인 구조 속에서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자신만의 희망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재개발로 일확천금의 부푼 꿈을 희망하며 살고, 또 다른 곳에서는 지긋지긋한 월세방을 벗어날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 희망들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지만, 간절한 정도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우리는 집을 둘러싼 현실의 씁쓸함을 목도한다. 누군가에게 집은 주거지의 역할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돈벌이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누군가에겐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 누군가에겐 추억이 깃든 곳, 누군가에겐 그저 돈벌이가 되는 곳... 이렇게나 의미가 다른 집들이 많은 분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공간이 되길 바라게 된다.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면서도 조그마한 온기를 머금으며 행복한 기억들로 채워진 그런 집으로 말이다. 

돌아볼 때마다 집은 조금씩 더 작아진다. 이제 저 집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신을 반겨주던 순간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을 듯하다. 마당 한쪽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던 오후도, 빨갛게 날리는 불티를 올려다보던 저녁도,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자욱하던 아침도 집은 다 잊은 것 같다. - P48

지난번에 지우 언니랑 저기까지 갔었거든요. 언니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저 다리 건너면 21세기, 여긴 20세기라고 했어요. 이 동네가 엄청 구리다는 말이겠죠? 근데요. 언니는 20세기에 안 살아봤잖아요. 21세기보다 20세기가 더 좋을 수도 있잖아요. - P73

다 잊었다고 생각한 어떤 시간들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아쉽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후회된다거나 하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만옥은 그 짤막한 뉴스가 끝난 뒤 정신을 차린 듯 접수대를 지나 병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복도를 걷는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부서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다만 눈에 보이는 저 낡은 주택들만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 P104

그건 기대였고 우려였고, 가능성이자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방향을 조금만 틀면 완전히 달라 보이는 홀로그램처럼 밤새 그녀의 내면에서 반짝거렸다. 아니, 그건 그녀가 도무지 짐작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던 자신의 미래였는지도 몰랐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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