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할 여자들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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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하는 사람의 서사는 전쟁에 나간 남성의 서사만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질에서 나와 빛을 만나는 것이 말 그대로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기나 한 것처럼." (93쪽)
 
"가부장제의 비극은 인간의 경험을 둘로 쪼갠다는 것이다. […] 울지 마,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마, 꽃 앞에 서서 감탄하지 마.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특성들은 전부 인간 삶의 모습이다. 동시에 우리가 남성에게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다." (162-163쪽)


전작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가 경제학의 ‘남성적’ 측면을 비판한 책이라면 『지구를 구할 여자들』은 과학기술사에서 젠더 관념이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를 파헤치는 책이다. 물론 이번 책에서 또한 경제학의 ‘남성성’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굴러가지 않는다.

흥미롭다 못해 충격적인 사례가 넘친다. 수 세기 동안 인간의 삶을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구분하려 애쓴 결과, 편안함과 안정성을 골자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여행 가방에 바퀴를 달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기까지, 그리고 전기차가 지닌 안정성과 친환경성이 보편적 특징으로 인정받기까지 ‘젠더’ 문제가 심각하게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째서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 ‘여성적’인 특징으로 제한되어야 했는가. 남성들은 왜 인간의 몸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그토록 받아들이기 두려워했는가.

청동기, 철기처럼 시대를 구분하는 명칭에 ‘남성적’ 서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분석 또한 색달랐다. “직물과 도기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청동과 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텐데도” 이것들은 ‘여성사’로 분류되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채 밀려났다고 보는 것이다.
책의 해제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인류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용한 최초의 도구로 보통 창과 같은 무기를 먼저 생각하기 쉬운데,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은 다르게 보았다. 채집한 것들을 담는 데 썼을 장바구니나 가방 같은 용기가 더 중요한 도구였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유익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9장에서 ‘제2의 기계 시대’를 이야기할 때 저자가 기본소득을 잠깐 언급하는데, 이를 포퓰리즘으로 치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페미니즘과도 절대 무관하지 않다. 가사 노동, 돌봄 노동과 같이 일반 경제 이론에서 노동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활동, 즉 '보이지 않는 노동'의 종사자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내가 저자의 의도를 삐딱하게 이해한 걸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똑같다.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거짓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 현재 우리가 ‘여성적’인 것으로 코드화하고 있는 개념들이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자질임을 깨닫기까지 또 다시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우리는 “혁신과 젠더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팬데믹, 기후 위기를 겪으며 인간 실존 문제에 정면으로 맞닥뜨린 이 시점에서, 과학기술사에 여성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 왜 중요한지 톡톡히 짚어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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