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영화의 사실성과 일관성의 문제 : <괴물>의 경우...

결국 마누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괴물>이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문득 기게스의 반지와 투명인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언급을 떠올리게 되었다. 존 바스는 에세이 "보르헤스와 나"에서 1967년에 하버드 대학의 찰스 노턴 강의에 강연자로 참석한 보르헤스를 "록펠러 기금으로 낚아채" 자신이 근무하던 뉴욕 주립대 버펄로 캠퍼스에서 강연을 하게 했던 사건을 회고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곧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그는 아주 훌륭했다.(사실 그 후 미국여행 시에 그는 "준비된" 강연보다는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들과 담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예컨대 공상과학 소설에 자기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H. G. 웰스의 <투명인간>과플라톤의 <기게스의 반지>를 멋지게 대조시켰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반지를 끼는 것은 단 한 가지 불가능한 것만 요구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몸을 안 보이게 하는 화학약품을 마신다는 것은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버티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학약품보다는 반지가 더 삼키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멋진 15분이 흘러갔다. (존 바스, "보르헤스와 나," <소설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 김성곤 편역, 글, 1992, 59쪽)

하긴 그렇다. "투명인간"이 자칭 과학적 근거에 의지한 거짓말(허구)이라 한다면, "기게스의 반지"는 환상에 근거한 거짓말이다. 이 경우에 어느 쪽이 더 손쉬운지는 명백하다. 반지야 "원래 그런 것이 있다"고 한 마디 던지면 그만이다. 그 유래가 무엇인지, 그 한계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도 없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반면 플라톤에 비해 지극히 현대인이었던 웰스는 "투명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과학적인 "그럴듯함"을 끌어들였고, 그러다보니 이후의 진행상황에 대해서도 수시로 "그럴듯한" 묘사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다. 똑같은 "뻥"이지만 기게스의 반지가 "큰 뻥 하나"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투명인간은 "작은 뻥들"을 쉴새없이 갖다 붙여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둘 중 어떤 게 경제적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치는 뻥이라면 아예 확실하게 꽝 쳐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모순도 줄어들고 굳이 머리를 짜낼 필요도 없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 "아까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아? 가령 주인공이..." 라고 말을 꺼내면,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대답은 십중팔구 "에이, 그러니까 영화고 그러니까 드라마지. 그럼 뭐 얼마나 사실적인 걸 기대했어?" 하지만 이때 상대방의 대답은 "사실성"과 "일관성"을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는 정의 자체부터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허구는 비록 사실성은 결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일관성마저 결여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해 영화나 드라마가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걸 누가 모르느냐는 거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럴 듯한 허구"가 되기 위해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가지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비판할 적에 "어차피 허구인데 뭘 그러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의 반박은 일종의 핑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이전부터 "이것은 허구다"라고 자인한다면, 그들은 결코 영화나 드라마에 몰입하지 말아야 하고, 몰입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허구를 비판적인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진저리를 치며 "허구일 뿐"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일수록 사실은 그 허구에 깊이 "몰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자체의 일관성 부족이나 비논리를 지적하면 마치 덴 상처를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는 듯 "발끈"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들은 허구를 허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구를 자신이 본 작품의 "약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적에 발끈한다. 그만큼 자신이 본 허구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사실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일관성"마저 없어지고 나면 결코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혹은 <해리 포터>나 < E. T. >같은 영화를 보자. 이건 그야말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실적 소재"와는 완전 담을 쌓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영화가 전혀 "일관성"조차 지니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가령 < E. T. >나 <킹콩> 같은 경우에는 외계인이나 괴물 같은 허구의 존재가 나타나긴 하지만, 그 외의 인간들은 그런 상황에서 있을 법한 상당히 "그럴 듯한" 반응을 보이며 일관성 있게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 나오는 요정이나 마법사는 허구의 존재이지만, 이들 역시 인과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 역시 어떤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런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는 영화나 드라마나 다른 작품이 있다면, 관객은 결코 그것을 "그럴듯 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결코 그것에 "몰입"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야 결코 24시간 내내 이상적이거나 합리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논리보다 비논리적으로 행동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은 현실을 능가하는 "논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현실과는 달리, 이것들은 필름이나 종이 위에 "고정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달리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이런 "허구"는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현실"에 가까워야 한다는 역설을 요구사항으로 내세운다. 어쩌면 히치콕이 "제아무리 사실적인 영화라도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과장을 펼쳐야 관객들이 그럴듯 하다고 수긍한다"고 말한 것이나, "현실이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같다"는 역설이야말로 바로 이런 뜻을 암시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내 경우에는 <괴물>의 줄거리를 모두 다 알고 보았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면도 없진 않을 것이다.(솔직히 요즘 인터넷 쓰는 사람 중에서 <괴물>의 줄거리를 "전혀" 모른 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행운아가 과연 있기는 할까? 아마 한강의 괴물인지 아기공룡 둘리인지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줄거리 못지않게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킨 요소는,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투명인간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끼워넣은 계속되는 변명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괴물>이 보다 "그럴 듯한"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차라리 주인공(?)인 괴물이 "어디서 그런 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불쑥 내뱉고 시치미를 뚝 떼는 게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감독의 듀나의 비아냥처럼 "한국의 좌파 남성이 생각할 법한" 내용을 모조리 이 영화에 쏟아부은 모양이지만,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제공하기 위해 덧붙여진 이런저런 부가 설명은 오히려 "일관성"을 잃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미군부대에서 독극물인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방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제아무리 "영화적 상상력"이 발동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낚시꾼의 컵 안에 들어갈 만큼 작았던" 돌연변이 생물체가 그야말로 "버스 크기만큼 자라났다"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단지 그 한 마리 이외에 나머지 한강 생태계에는 얼핏 보기에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물론 "한강의 돌연변이"라고 하는 설정도 나름대로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깊은 바다에 살다가 우연히 한강으로 올라온 돌연변이"라고 했다면 보르헤스 식으로 "더욱 그럴듯"했을 것이라는 거다.

그 외에도 온갖 트집거리를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다. 처음 대낮의 습격 장면에는 그야말로 버스 만한 크기로 묘사된 괴물이 어떤 장면에서는 불과 승용차 크기로 묘사되기도 하고, 가족들은 밤섬이 뻔히 바라다보이는 서강대교 남단에서 여자아이를 잃고 하루 종일 엉뚱한 하수관만 찾아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야 "그 옆의 옆"에 있는 원효대교 북단을 찾아가며, 총을 몇 방이나 맞아도 꼼짝 않던 맷집을 자랑하던 괴물이 미국의 최신 "살충제"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솔직히 그 정도로 독한 살충제라면 간신히 구출한 아이들을 비롯해서 가족들이나 그 주위 사람들 모두 진작에 기절하거나 돌아가셨어야 옳지 않았을까. 솔직히 그 장면에서 괴물이 또 다른 "독극물 방출"에 괴로워하는 장면만 보면 갑자기 괴물이 안쓰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미국"이라는 공적 앞에서는 말 그대로 "괴물"인 괴물조차도 "자연"이나 "환경"의 아이콘이 되는 셈일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쇠꼬챙이에 찔려 세상을 하직하며, 분노한 할아버지는 "총알이 단 한 방" 들어 있는 사냥총을 들고 이거면 된다는 식으로 괴물과 1대 1로 맞서고, 괴물은 그냥 얌전하게 헤엄쳐 건너가도 될 강물을 굳이 "힘들게" 한강다리 밑에서 재주넘기를 하는 식으로 건너가고, 처음에는 딸이 죽었다고 해도 어리버리 정신 못 차리면서 골뱅이 통조림 따먹기에 열중하던 "덜 떨어진"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나중에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호흡을 척척 맞춰 괴물을 처단하고, 괴물은 마치 이런 처벌의 이유라도 제공하려는 듯 친절히 기절한 척 입을 벌려 자기가 "먹던" 두 아이를 뱉어놓고 나서야 다시 일어나서 펄펄 뛰어다닌다. 그리고 한강에 살던 괴물이 어느 날 갑자기 "대낮"부터 교각에 매달려 있다가 육지로 올라와서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은, 아무리 스펙터클이 필요했다손 치더라도 지나친 오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커다란 괴물이 몇 년째 한강에 산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고 치면, 괴물은 아마 될 수 있는 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생존 전력을 취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분명히 뭔가 먹고 살아야 하긴 했을 테니, 간혹 고수부지에 어정대는 얼빠진 인간들을 납치하긴 하되, 공급 중단 사태가 없도록 최대한 은밀하고도 알뜰하게 챙겨먹었을 것이다. 솔직히 자신이 붙잡아 놓은 "먹이"가 도망가려는 시도를 시치미 뚝 떼고 지켜보다가 중요한 순간에 "장난"을 칠 정도로 "쎈쓰쟁이"인 괴물이라면 지능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인데, 그런 놈이 아무리 빡돌았다거나 배고팠다 치더라도 고수부지 위에 올라와서 한 달 먹을 식량을 제멋대로 헤집어 놓고, 정작 먹이를 "먹는" 것보다 "뒤쫓는" 것에 몰두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이런 트집이 정말이지 트집으로만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엔 "장점"도 많다. 아니, 어쩌면 장점이 많기 때문에 그런 "단점"이 더더욱 두드러져서 안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괴물이 처음 등장하는 추적 장면은 상당히 박진감이 넘치고, CG도 효과적으로 잘 사용되었다고 본다.(맨 끝에 불 붙는 장면은 제외하고. 그건 솔직히 CG의 한계랄까, 좀 노골적으로 티가 났다.) 일부 언론에서는 괴물이 사람을 뒤쫓다가 제풀에 자빠지기도 하는 장면을 "봉준호식 유머 감각"으로 과대해석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괴물이 그렇게 자빠지는 것이 더욱 "일관성"있게 보인다. 하긴 버스 크기의 커다란 괴물이 그런 속도로 달린다고 칠 적에, 뭐 연습이라도 한 듯이 한 번도 비탈길에서 미끄러지지도, 헛발질을 하지도 않고 매끈하게 움직이겠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빌딩 만한 괴물이 쿵쿵대고 질주해도 바닥에 발자국 하나 패이지 않은 <고질라>가 더욱 이상한 영화 아닌가. 물론 <괴물>에서도 CG로 묘사한 괴물의 움직임은 대단했지만, 한편으로는 듀나가 해리하우젠의 수작업 특수효과를 평가할 때 한 지적처럼 그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령 "버스만한" 크기의 괴물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 때 물결이나 물보라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튀었던 것을 보라.(특히 처음에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는 "백조 보트"가 둥실둥실 떠 있는 사이로 뛰어드는데, "버스만한" 괴물이 첨벙 뛰어들었는데도 주위의 보트들은 한 대도 뒤집어지지 않고 미동조차 없다.)

비중이 괴물 쪽으로만 쏠려 있기 때문일까, 송강호가 맡은 딸 잃은 아빠의 인물 설정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모호하고도 일관성 없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푼수처럼 실수만 반복하는 주인공은 자기 아버지의 시신과 경찰의 추적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징징거리다가 결국 체포될 정도로 덜 떨어진 인물이지만, 얼떨결에 뇌 생검을 당한 후에는 갑자기 수퍼맨이라도 된 듯, 의사를 주사기로 위협해 탈출에 성공하고, 심지어 괴력을 발휘해 콘크리트 매달린 경고판을 박살내 무기로 사용한다. 물론 딸의 죽음으로 인해 흥분해서 괴력을 발휘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맨 처음에 딸이 괴물에게 "끌려가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제 한 몸 건사하는("아버지, 나 죽는 거야?"라고 물어보고, 먹지 말라는 통조림까지 따 먹으면서) 데에만 열중하다가, 맨 끝에는 기절한(?) 괴물의 입을 맨손으로 벌려 아이들을 꺼내고, 한참 동안 괴물을 등지고 딸을 품에 안은 채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전형적인 "결말용 클로즈업"을 보여주다가, 역시 맨손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괴물을 찔러 죽이는("드라마-드라마주의"의 신봉자인 집사람조차도 이 대목에서 "차라리 괴물이 쇠파이프에 박히는 순간, 쇠파이프를 지지하던 송강호의 오른손이 찢어지거나 다쳤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나타냈을 정도였다.) 괴력을 발휘한 직후에는, 자기 딸과 함께 괴물 뱃속에서 나온 소년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한다. 솔직히 나는 <괴물>이란 영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갖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전반부는 매우 "훌륭"하지만, 후반부는 매우 "엉성"하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처음 10분 동안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연출이나 줄거리가 후반부에는 해당되지 않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별로 설득력은 없어 보였던 "반미"라는 주제였다. 물론 이 영화에서 "괴물"의 발생 이유를 제공한 미군부대의 독극물 고의 유출 사건은 명명백백한 범죄이지만, 이후에 한강에서 괴물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미군부대나 미국정부의 개입이나 "살충제" 도입 등의 주장은 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솔직히 미국이 그 정도로 "한강 괴물"의 처리 문제에 개입하려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단순히 주한미군 하사관 한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 주한미군만 습격한다거나 아예 대추리 미군부대 이전 예정부지가 "괴물의 둥지"였기 때문에 괴물이 보복으로 미군을 습격하고, 이에 대해 미군이 "이는 미국에 대한 도발 행위"이기 때문에 한국에 병력을 증강하거나 신무기를 배치한다는 식으로 나와야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 듀나의 지적처럼 "버스 만한 크기의 괴물이 대낮부터 수도 서울 한가운데의 한강에 나와 수십 명의 시민을 죽인" 판에 기껏해야 바이러스를 운운하며 방역업체 직원들보고 고물 트럭이나 몰고 다니며 소독약을 뿌리라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야말로 "데프콘" 급의 비상사태가 되어 특수부대를 비롯한 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한강에 투입되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움직이는 놈은 뭐든지 쏴버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야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물론 "반미"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비판하고픈 것은 아니고, 분명히 영화에 나와도 될 소재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욕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반미건 친미건, 아니면 친공산주의나 심지어 "친노" 발언을 하고 싶더라도 뭔가 좀 더 "그럴 듯한" 맥락에서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솔직히 강우석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노골적인 쇼비니스트적 "교훈"과 봉준호의 노골적인 좌파적 "교훈"이 뭐 다를 바 있겠는가? <괴물>에서 봉준호는 "한국의 좌파 남성"으로서 뭔가 한 마디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의도한 "한 마디"는 <괴물>이라는 영화의 다른 요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뜬금 없는 한 마디"로 남아있었던 것만 같아 아쉽다.

뭐, 이미 나온 영화의 각본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찧고 까불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처럼 시간낭비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세계적인 특수효과 팀을 불러서 탁월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이면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각본"에 있어서는 아직도 엉성하기 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순수 국산 CG 특수효과를 운운하면서 나온 심형래의 <용가리>를 봤던 사람이라면 봉준호의 <괴물>에 대해서는 AAA+++ 를 주고도 남았겠지만(왜냐하면 <용가리>는 CG도 각본도 연기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전무한 졸작이었으므로.) 그런 식의 자뻑스러운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취해 보면 아무래도 <괴물> 역시 "볼만한" 작품일망정 "걸작" 소리를 듣진 못할 것 같다.(듀나는 이 작품에 대해 별 네 개 만점에 별 세 개 반을 줬는데, 솔직히 나로선 별 세 개, 아니 별 두 개 하고 2/3을 주겠다. 그만큼 선뜻 추켜세우긴 힘들 정도로 아쉬움이 많다는 거다.)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스크린쿼터 문제도 있어서 가뜩이나 힘든데... 한국영화를 사랑하자"는 도덕교과서적인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야 한국영화 외국영화를 가르기보다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 혹은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로 구분할 뿐이다. 제아무리 한국영화라도 "못 만든 영화"는 "나쁜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내 신념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엉성한 영화를 단지 "국산"이란 이유만으로 치켜세우는 것 역시 국수주의의 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옛날에 비해서는 나아졌다"고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이, 지금이야 과거와 달리 온갖 소재와 금기에 대한 묘사가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각본" 자체부터 삐걱거리기는 여전하니 말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 1950년대 중반에 나온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만 보더라도, 요즘 나오는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 각본을 뺨치게 잘 썼다. 그렇다면 솔직히 영화의 특수효과 같은 기술적 측면을 제외한다면, 각본이나 연기나 연출력 같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지는 않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과거에 비하자면 요즘 한국영화는..." 하고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다. 내가 보기에 요즘 한국 영화는 훨씬 넓어진 소재의 가능성과 발전한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승자박 식으로 저질 코미디와 로맨스, 그리고 짝퉁 블록버스터만 만들어내는 쳇바퀴를 여전히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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