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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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집이다. 문장들이 가벼운 듯 가볍지 않다. 가볍게 떠다니는 것 같다가도 가볍지 않은 무게로 다가올 때가 있다. 어린아이의 시각이라 더 그런가? 책 다 읽고 알라딘에 팔까 했는데 내 처음들을 기억나게 해 준 책이라, 다시 생각하고 싶을 때 꺼내 읽으려고 책꽂이에 꽂았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선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이다. 한때 내 인생 모토가 내일은 새 날이니까 모든 것이 새로운 어린아이처럼 살 자였던 게 생각이 났다. 지금은 다른 걸로 바뀌었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누구나 서툴 수 있다. 여름과 루비는 많은 처음을 경험한다. 성장 소설의 묘미는 역시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인 것 같다. 나도 겪었던 수많은 처음들이 생각났다. 무뎌지기 싫어서 예민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항상 새로운 것으로 대하고 싶었다. 지금은 새롭게만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때의 결정을 토대로 더 발전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처음은 크게 다가온다. '첫-'이라고 이름 붙이기 쉽다. 그래서 이번에 겪은 많은 것들이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온 거겠지. 나에겐 수많은 처음이 있고, 앞으로도 많은 처음이 있겠지. 무뎌지긴 싫다. 처음 겪는 일은 설렘을 갖고 바라볼래. 처음이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상실감을 더 크게 느끼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뎌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듯싶다. 무뎌진다는 건, 그만큼의 이겨낼 힘을 갖게 된 거니까. 바이러스 같은 거네. 바이러스를 먹고 이겨낼수록 내 백혈구들은 강해지니까ㅋㅋㅋㅋ


사랑은 한순간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은 지속된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평생을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은 본인을 갉아먹는 일이다.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문득 떠오를 때마다 미워하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되새겨야 하니까. 노력해야만 지속되는 게 사랑일까?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데에 이유가 있나 그냥 좋아하니까 그러는 거지. 나한테 사랑은 그런 거다. 내 행동에 이유가 없다. 생각하지 않고도 그냥 그렇게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 웃는 건 정말 힘들다. 근데 웃으면 정말 웃어서 그 감정을 버릴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는데, 회피력만 늘었다. 물론 힘들 때 웃고 넘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왜 힘든지, 어떤 게 날 힘들 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 번쯤 그 힘듦을 마주하고 원인을 파악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 감정에 매몰되지는 않도록.


읽고 나니까 또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


사랑이 시작되는 건 한순간이다. 미움이 쌓이는 데엔 평생이 걸릴 수 있지만. 일곱 살 때 그걸 알았다. 그 반대가 아니란 것.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선 평생을 노력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 P22

미옥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법도 없었다. 문제가 생겨도 ‘그게 뭐, 별일이라고?‘ 말하고는 웃어버렸다. 그냥 웃는 게 아니라 웃어-, 버렸다. 웃음 뒤에 따르는 것들- 멋쩍음, 짧은 적막, 달라진 공기, 몸의 들썩임, 허전함, 씁쓸함-마저 웃음과 함께 버렸다. 마치 버리기 위해 웃는 사람처럼. - P61

상심으로 죽을 수 있는 건 개와 어린애뿐이야.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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