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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끌려! ㅣ 생각학교 클클문고
김이환 외 지음 / 생각학교 / 2022년 7월
평점 :

내가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란 걸 인정하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왜 그 때가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시점부터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울타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중독의 시작은 ‘상관없어’라는 마음이다. 이거에 빠져도 상관없어, 이거 때문에 할 일을 못 해도 상관없어, 나를 잃어도 상관없어… 내가 잃어버리고, 잃어버렸던 것들이 더 이상 상관없는 것이 아니게 될 때, 그제야 중독은 불편한 이물감이 된다.
나는 10대에 제일 ‘중독’이라 말할 수 있는 증상이 심했던 것 같다. 학교는 나를 ‘문제 없어 보이게’ 만들어 주는 울타리였다. 그 안정감에 기대어 고삐풀린 듯이 지냈다. 사랑하는 것들이 적었던 나이인 만큼 지키고 싶은 것들도 없었다. 10대의 내가 들으면 열받아 하겠지만, 역시 10대는 중독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나이가 맞다.
<자꾸만 끌려!>는 나처럼 중독에 빠진 5명의 10대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오라클> : 게임 중독
상진은 베타테스터로 <중독>이란 VR게임에 접속한다.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와 비슷한 살인마로부터의 탈출 게임 중독. 상진은 진짜처럼 느껴지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살인마에게 탈출하기 위해 목숨 건 미션을 수행한다. 읽다보면 자연스레 게임 화면이 떠오를 정도로 추격하는 부분들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었다.
만약 세상에 <중독>과 같은 VR게임이 발매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게임중독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짜 고통’같지만 진짜가 아니기에 사람들은 현실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 느낄 수 있는 진짜같은 도파민체험. 이것만큼 중독적인 게 또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살이 찌면 낫는 병> : 다이어트 중독
현아는 친구를 따라 다이어트약이라 불리는 ‘나비약’을 먹고 살을 빼기 시작한다. 식단과 운동만 했을 때보다 원활하게 빠지는 살. 현아는 그러나 자신의 몸무게에 만족하지 못 한다.
‘프로아나’가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영양실조로 병원에 입원하고, 의사가 억지로 먹인 병원밥을 먹토 했다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건 보이는 모습 그대로 인정받는 것이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여겨주는 세상의 모습을 원할 뿐이었다. 그러나 배고프면 너가 왜 배가 고프냐고 낄낄대고, 슬퍼하면 꼴 보기 싫다고 눈 흘기던 사회는 그들의 망가진 심신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세 번째 이야기 <우정은 동그라미 같은> : 관계 중독
유일한 친구가 이민을 가면서 혼자 남겨진 하리. 그런 하리의 곁에 새로운 친구들이 다가온다. 털털한 성격의 나은과, 반대로 섬세한 성격의 서현. 그러나 홀수는 불완전한 법. 둘이 붙으면 하나가 남는 불편한 이 상황을 하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개인정으로 가장 공감이 많이 되는 작품이었다. 많은 학생들의 가장 큰 불안은 친구와의 관계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그런 불안을 안고 지냈던 경험이 떠오르며 감정적으로 몰입하며 읽었다. 한 번도 그런 불안감을 ‘관계 중독’의 증상이라 생각해본적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느끼게 해준 이야기였다.
네 번째 이야기 <형이 죽었다> : 인정 중독
정욱의 가족은 때이른 장례를 치렀다. 첫째인 인욱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정욱은 무너져가는 가족을 살리기위해 인욱의 빈자리를 매꾸려 한다. 자신과 완전히 반대인 성향을 가진 형이었지만, 부모님의 상실감을 채워드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다 형의 여자친구인 미소가 나타나고, 처음으로 형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듣는다. 그리고 형의 유언장에 왜 자신이 언급되지 않았는지도.
나는 농담으로 스스로를 ‘도파민 중독자’라고 말하고 다닌다. 사실 농담인척 하는 진담이다. 나는 정말로 도파민 중독이 맞다. 그 증거로 SNS란 SNS는 전부 하고 있으니까. 인정 욕구가 강한 나에게 SNS는 쉽게 인정욕을 채울 수 있는 도구다. 그러나 아직 내가 만족할만큼 인정 받을만한 성취가 없어서 그런가, 한 번도 채워진 적은 없다. 인정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그 감정 중독이 스스로를 망가뜨릴만큼 위험한 것이라면, 우리는 인정과 만족의 선을 어디까지로 정해야 하는 걸까?
다섯번째 이야기 <세계 다람쥐의 날> : 스마트폰 중독
우주 행성 중 한 곳인 ‘테크 시티’에 사는 서윤의 가족. 이름답게 신기술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새핸드폰 ‘에토스 나인’이 출시 되고, 행성사람들 모두가 핸드폰의 새로운 기술에 빠져든다. 하지만 에토스나인의 인공지능은 사용자의 핸드폰 중독을 우려하며, 일주일간 강제 핸드폰 셧다운에 들어간다. 서윤은 7일간 무사히 핸드폰 없이 살 수 있을까?
10대 때 우연히 <절망의 구>를 읽고는 김이환 작가님의 팬이 됐다. 핸드폰 중독이란 뻔한 이야기의 배경을 우주로 바꿔서 시작한 점은 정말 감탄이 나온다. 해외에서 지내보니 한국만큼 핸드폰 없이 살 수 없는 나라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가끔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거 같기도 하다. 테크 시티 사람들은 그래도 일주일은 버텼지만, 한국은 몇 시간도 못 버틸 거다. 그렇게 보면 이 나라는 이미 거대한 핸드폰 중독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중독자가 되어 버려서, 자신이 중독자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 할 정도로 말이다.
<자꾸만 끌려!>는 중독에 관한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생각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옴니버스라 한 편씩 부담없이 읽기도 좋고, 글도 유쾌하여 편하게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