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통의 발견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습하고 추운 계절을 지나 여름은 더디게 다가왔다. 다가온 여름은 부패를 부추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여름을 기다렸다. 곧 떠날 사람들은 창문 밖으로 계란이나 버터를 담은 장바구니를 내걸며 도시의 여름을 버틴다.

 

   낯선 도시에서 화자는 불통에 시달린다. 도시의 곳곳은 파업으로 정체되었고, 파업의 여파로 진학할 대학에서 보낸 합격서류는 도착하지 않는다. 그녀가 한 달 후 어디에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화자는 어학연수를 위해 프랑스에 온 지 여러 달째 접어들지만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고요히 지낸다. 단조로운 일상 속의 정기적인 스케줄은 어학 실력 향상을 위해 어학원에서 주선해 준 르블랑 부인과의 대화 시간이 유일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한다. 르블랑 부인은 가는귀를 먹었고, 화자는 어법에 맞지 않는 말들을 더듬더듬 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통과 더불어 화자는 가족과도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먼 자리에 놓여있다. 그녀의 엄마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생동감 있는 거짓말을 소통의 도구로 삼는다. 화자는 거짓말을 일삼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고, 둘 사이에 솔직함이 존재한 순간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별거 중인 남편은 결혼하면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하자는 말로 청혼했지만 결혼 후 삼 년 만에 불륜 사실을 밝힘으로써 화자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국의 낯선 문화적 환경과 서툰 언어 속에서 불통을 겪으며 화자는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고 유창함이라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안에 표현되지 않는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이 떠다니고 발아되지 못한 말의 씨앗들이 내면에 번져가도 그녀는 고요히 문을 잠근다. 엄마와의 소통도(나는 그냥 폴더를 닫았다. 액정의 불빛이 사그라져 사방에는 다시 어둠뿐이었다. p.187), 르블랑 부인과의 소통도(르블랑 부인과는 침묵의 순간이 더 길어졌고, 그래서 곤혹스러웠다. p.188) 포기한다.

 

   그러다 어느 새벽, 그녀는 푸르비에르 성당을 찾게 된다. 이 도시의 시발점인 언덕 위에 자리한 성당은 고즈넉한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오르간 소리가 성당 안을 울리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대리석 천장을 공명시키는 노랫소리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곡조의 장엄하고 우아한 화음을 이룬다. 그녀는 그 화음을 들으며 이 도시에 온 이후 처음으로 르블랑 부인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그녀가 사는 기숙사는 대부분 곧 떠날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보여 주고 싶은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며 제한된 삶을 산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끼리 모여 남은 재료로 저녁식사를 해먹자󰡑는 내용의 공고문이 붙고, 한 학기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음식을 나누며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 한정된 단어와 제한적인 문형으로 조합된 불분명한 문장들, 그 실수투성이의 문장들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대화들. 누구도 상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전달된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화는 이어진다. 그 대화에 문장의 형식이나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화자는 󰡐신기한 체험󰡑이라고 말한다.(우리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p.195)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고 유창함이라 생각했던 그녀가 진실도, 유창함도 넘어서는 그것,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의 중함을 깨닫는다. 프르비에르 성당에서의 경험과 기숙사에서의 공동 식사를 통해 중요한 것은 소통의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일이라는 걸 깨우친 것이다. 공동 식사의 장면에서, 그들의 대화는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곡의 가락처럼 들린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소통을 포기했던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또 르블랑 부인을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렇게 소통의 행위를 결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고요하게 울리는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 p.196)

   파업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시의 파업은 결국 마무리될 것이고, 그녀의 합격증은 도착할 것이다. 불통의 고통은 소통의 행위로 희석될 것이고, 그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유창함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통의 발견으로 희망을 드러내며 끝맺음되는 이야기는 작가의 긍정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녀가 날 때부터 곁에 없던 아버지에 관한 여러 이야기 중 먼 나라를 떠돌며 집을 지었다는 사내를 가장 좋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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