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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채식주의자 (개정판) ㅣ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주된 서사적 작동 방식은 어떠한 감정 상태를 직접적으로 노출하고 고정하는 데 있다. 인과관계와 맥락이 적절히 설명되지 않은 채 감정의 강도가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고통은 대부분 연민을 유도하는 미학적 표면으로 기능한다.
이 작품에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은 단순한 불호나 취향 차원의 거부감이 아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고통, 붕괴, 비정상성, 욕망, 타자화, 예술이라는 여러 요소를 다루는 방식이 지나치게 미학화되고, 자기연민적이며, 무엇보다 책임과 구조를 흐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불쾌감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흔히 폭력과 규범, 여성의 몸, 가부장제와 억압의 문제를 다룬 서사로 읽히는듯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고통을 사유의 대상으로 구조화하는 대신 감정적으로 전시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텍스트로 읽혔다.
이러한 특징은 영혜라는 인물의 구성 방식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작품은 영혜의 내면을 해석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설명되지 않은 모호하고 강렬한 감정, 분절된 욕망, 불투명한 상태만을 거듭해서 제시한다. 그는 주로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데, 그 시선은 서사 내에서 충분히 상대화되지 못하여 오히려 그를 일방적으로 가련하고 매혹적인 대상으로 고정한다. 내면의 언어가 제한된 채 과잉 제공된 그러한 타자의 관찰은 독자 역시 그 관점을 내면화하여 동정심이 해석의 중심에 자리잡게 만든다. 그 결과 영혜의 고통은 주체적으로 구축되지 못하며 이해가 아닌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인물의 행위와 책임이 분명히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혜는 억압적 구조 속의 피해자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반복적으로 소통을 거부하며 관계를 붕괴시키고, 자신의 선택이 타인에게 지속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조정하지 않는다. 형부와의 관계 또한 단순한 피해 구조로 환원하기 어려운 복합성을 지님에도 이러한 맥락은 쉽게 제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이러한 상호작용을 해석하거나 윤리적으로 조망하지 않는다. 반면 인혜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제대로 된 독립적인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며 중심 인물의 고통을 강화하는 장치로 축소된다. 능동적 소통을 시작하지 못했다는 책임은 억압적 악인이라는 형태로 주변인들에게 오롯이 씌워진다. 중심 인물에게 연민의 감정을 집중시키는 이 설계는 결국 관계의 다층성을 드러내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게 구축된 감정은 독자층의 주류 해석으로 거의 그대로 재생산된다. 많은 독해가 이 작품을 단선적인 피해자 서사로 수렴시키며, 그러는 와중 인물 간 상호작용의 복잡성은 쉽게 간과된다. 영혜의 붕괴를 가부장제 트라우마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실제 드러난 근거보다는 외부 현실을 투영하여 결핍된 인과를 보완하는 형태에 가까워지곤 한다. 직접적으로 확인가능한 요인은 남편과의 소통 부재와 아버지의 권위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영혜의 심각한 정신적 붕괴 수준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영혜의 피해자성이 존재함은 사실이나 역으로 그의 가해자성(대표적으로 인혜와의 관계에서의)은 용인 혹은 묵인되고 독자 또한 그를 향한 특정 감정에만 주로 결속된다. 조금 과격하게 비유하자면, 이 지점에서 서사는 소위 “불행포르노”와 구별되기 어려워진다. 고통은 반복되고, 심화되며, 감각적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하며 의미를 가지는지는 끝내 해명되지 않는다. 이는 불편함을 주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것을 유의미한 사유로 전환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특히 2부의 예술 서사는 이러한 문제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욕망과 충동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호출되지만 그 과정에서 필요한 개념적 거리와 성찰은 확보되지 않는다. 예술은 탐구의 장이 아닌, 비윤리적 행위를 일으키는 감정과 광기 등 자기 상태에 대한 몰입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을 혹자는 “포스트모던한 감각”, “몸의 정치성” 등의 개념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정, 몸, 욕망, 비이성이라는 요소들이 등장이 자동으로 설득력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인데, 이 작품은 그것들을 변형하거나 재구성하지 않고 그대로 제시하는 데 그친다. 이는 예술이라는 언어를 어설프게 차용한 도취의 반복이다.
결국 『채식주의자』의 한계는 고통을 다루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을 다루는 방식이 충분히 가공되지 않은 채, 연민과 미학의 이름으로 승인된다는 데 있다. 인물의 책임과 관계의 구조는 축소되고 그 자리를 감정의 과잉이 채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다면적 이해를 확장하는 대신 책임이 비워진 연민을 중심으로 조직된 서사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감정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인과와 맥락 속에서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구조를 지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은 채 감정의 강도만을 반복적으로 밀어붙인다면, 감정은 표현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책 속에서 고통이라는 감각은 유의미한 문학적 상태로 미처 변환되지 못한 채 미완의 1차적 배출 상태로 남았다.
더 나아가, 여성을 중심에 둔 이 서사가 과연 여성의 주체성을 확장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영혜는 자신의 언어와 판단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지 않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과 욕망 속에서 규정된다. 만약 이것이 비판적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적합한 구조적 장치를 통해 드러나야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객체화를 재생산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작년에 관람했던 영화인 『Substance』 와도 유사한 결의 찜찜함을 남겼다.
자극적인 인상이 항상 깊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 그것은 단지 가공되지 않은 감각이 과도하게 노출된 결과일 뿐이다.